소년기의 병약함이라는 유리종 안에서 보낸 시간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감각을 병적으로 예민하게 벼리는 과정이었다. 그의 존재는 대기의 미세한 진동이나 빛의 각도에 따른 사물의 표정 변화 타인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적 뉘앙스를 포착하여 형이상학적 사유로 변환시키는 살아있는 지진계와 같았다. 청년이 된 마르셀이 벨 에포크 시대 파리의 가장 현란하고 위험한 무대인 살롱의 문턱을 넘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사교계 데뷔가 아니었다. 그것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풀려난 죄수가 이데아의 태양을 향해 나아가려는 철학적 결단이었고 오르페우스가 하데스의 심장부로 내려가는 신화적 여정의 서막이었다.
당대의 살롱은 낡은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 그리고 예술과 지성을 무기 삼아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려는 이들이 서로의 가치를 탐색하고 교환하며 때로는 무자비하게 상대를 파괴하는 고도로 양식화된 전쟁터였다. 마르셀이 처음 초대받은 곳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예술가들이 모이던 아르망 드 카이야베 부인의 살롱이었다.
저택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그는 감각의 폭발적인 압력에 휩싸였다. 공기는 밀랍초와 향수 시들어가는 백합 향기가 뒤섞여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취제처럼 작용했다. 샹들리에의 빛은 크리스털 프리즘을 통과하며 현란한 아라베스크를 그렸다. 이 모든 감각의 홍수 속에서 마르셀의 의식은 외부 세계의 좌표를 잃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다. 심장은 겁먹은 새처럼 날갯짓했고 기관지가 예민하게 수축하는 불길한 전조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창백한 얼굴과 어색한 몸짓이 이 세련된 생물들 사이에서 얼마나 이질적인지 고통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시야로 한 인물이 들어왔다.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삭 백작이었다. 그는 위스망스의 소설 주인공 데제생트가 현실에 현현한 듯한 완벽한 예술 작품이었다. 뱀처럼 유연하고 오만한 몸짓과 조각처럼 정교한 얼굴 위로 그의 눈은 권태와 경멸 지적 우월감을 동시에 담은 잿빛 보석처럼 빛났다. 그의 단춧구멍에는 보랏빛 반점이 박힌 하얀 카틀레야 난초가 꽂혀 있었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찬미한 ‘악의 꽃’의 정수 즉 인위적이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그의 미학적 신조를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몽테스키우는 마르셀을 곤충학자처럼 훑어보았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는 친절함보다 해부학적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는 마르셀의 어깨에 놓인 실밥 하나를 떼어내며 금속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이, 그대의 영혼은 순수한 시(詩)일지 모르나 재단사는 서투른 삼류 소설가의 산문(散文)에 머물러 있군.” 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마르셀의 자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 고통 속에는 기묘한 쾌감이 뒤섞여 있었다. 경멸당했지만 동시에 ‘인정’받은 것이다. 몽테스키우는 훗날 그의 소설 속 샤를뤼스 남작이라는 거대한 인물로 변주될 씨앗을 그의 영혼에 심었다.
살롱의 다른 편에서는 아나톨 프랑스가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아포리즘을 설파하고 있었다. 마르셀은 오랫동안 그의 작품을 숭배해왔다. 그에게 아나톨 프랑스는 책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지성의 현현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작가는 피곤해 보이는 중년 신사에 불과했다. 그의 말은 지혜로웠지만 책에서 읽었던 것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었다. 이것은 마르셀이 평생에 걸쳐 경험할 근원적인 환멸의 첫 경험이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이데아와 그것을 창조한 예술가라는 현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그는 예술이 예술가의 삶을 초월하며 때로는 배반한다는 쓰라린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그 환멸의 순간 그의 귓가로 하나의 선율이 스며들었다. 멀리 떨어진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가브리엘 포레의 가곡이었다. 그 선율은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그의 혼란스러운 의식을 고요하고 내밀한 세계로 이끌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젊은이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작곡가 레이날도 안이었다. 마르셀은 자석처럼 그에게 이끌렸다. 레이날도가 연주를 마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밤색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 순간 마르셀은 내면에서 어머니의 입맞춤 이후 처음으로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의 싹을 느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음악을 통해 이루어졌다. 마르셀이 베를렌의 시를 읊조리면 레이날도는 즉흥적으로 화성을 연주했다. 음악은 살롱의 거짓된 언어가 오염시키지 못하는 그들만의 신성한 교감의 영역이 되었다. 그날 밤 이후 마르셀과 레이날도의 관계는 파리의 공원과 센 강의 안개 속에서 은밀하고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났다. 그들의 사랑은 당시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에 속했다. 모든 애정 표현은 암호화된 언어와 은밀한 제스처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다.
어느 날 오후 뤽상부르 공원 벤치에서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이 우연처럼 맞닿았다. 그 순간 마르셀의 온몸으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레이날도의 체온과 맥동이 그의 존재 깊숙이 전달되는 듯했다. 그의 호흡은 가빠졌지만 천식의 고통이 아니었다. 쾌락과 불안 죄의식과 황홀감이 뒤섞인 감정의 격렬한 분출이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타인의 존재에 의해 완벽하게 지배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이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들의 사랑은 예술적 교감을 통해 깊어졌다. 레이날도는 마르셀을 위해 작곡했고 마르셀은 그의 음악 속에서 자신의 문학이 나아갈 길을 발견했다. 레이날도의 음악은 하나의 주제 선율이 다양하게 변주되고 과거의 선율이 예기치 않게 다시 나타나 현재와 중첩되면서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파괴했다. 마르셀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포착하고자 했던 베르그송적인 ‘의식의 흐름’을 형상화할 열쇠임을 직감했다. 그의 대작을 관통할 ‘뱅퇴유의 작은 악절’이라는 신화는 바로 레이날도 안이라는 현실의 사랑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나 살롱의 세계는 이 순수한 사랑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르셀은 살롱의 총아가 되기 위해 능숙한 연기자가 되어갔다. 그는 아첨의 기술과 현학적인 농담 교활한 외교술을 터득했다. 진정한 감정을 가면 뒤에 숨긴 채 ‘매력적인 젊은 문학도’라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연기가 완벽해질수록 내면의 자기혐오와 공허감은 커져갔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살롱의 중심에서 가장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파티가 열리던 살롱 테라스에서 그는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문득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거대한 허구인가를 깨달았다. 저 불빛 아래 움직이는 인간 군상과 그들의 사랑과 증오 야망과 질투.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한 줌 먼지로 사라질 덧없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바로 그 실존적 절망의 순간 그는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이 덧없는 순간들과 거짓된 세계의 현란한 아름다움 고통스러운 사랑의 기억을 시간의 파괴적인 힘에 맞서 영원히 보존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에게 주어진 신성하고 가혹한 의무였다.
그는 더 이상 살롱의 일원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 세계의 냉정한 관찰자이자 비밀스러운 연대기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병약한 육체와 소외된 사랑 이질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각을 부여한 신의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마르셀은 다시 살롱으로 들어갔지만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코르크로 둘러싸인 미래의 방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문장을 쓰고 있었다. 화려한 가면 뒤에서 살롱의 이방인은 문학이라는 영원의 왕국을 건설할 고독한 군주로서 조용한 대관식을 치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