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0년 초여름, 레겐스부르크
다뉴브 강이 유유히 흐르는 고도(古都) 레겐스부르크는 권력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소집에 응해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속속 도착했다. 표면적인 의제는 황제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를 차기 황제 승계자인 로마 왕으로 선출하는 문제와,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토바 계승 전쟁에 대한 대책 논의였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짜 의제는 단 하나, 바로 발렌슈타인이었다.
독수리의 그림자는 이제 제국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13만이 넘는 대군으로 불어나 독일 땅을 거머리처럼 빨아먹고 있었고, 그 자신은 메클렌부르크 공작이 되어 어엿한 제국의 영방 군주 행세를 하고 있었다. 황제조차 그의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으며, 그의 ‘콘트리부치온’ 시스템은 제국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오직 그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제후들에게 발렌슈타인은 황제의 충직한 칼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에 겨눠진 칼날이자, 제국의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이었다.
이 불만을 가장 교묘하게 파고든 이는 가톨릭 동맹의 수장,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였다. 그는 황제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지만, 동시에 황제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하는 야심가였다. 그는 발렌슈타인을 제거함으로써 황제의 힘을 약화시키고, 가톨릭 동맹과 자신의 영향력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그는 루터파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비밀리에 접촉하며, 발렌슈타인 해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
“폐하께서 아드님의 승계를 원하신다면, 먼저 제국의 암적인 존재부터 제거하셔야 합니다.” 막시밀리안은 다른 선제후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황제를 압박했다. “발렌슈타인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로마 왕 선출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의 군대가 우리 영지를 약탈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국의 미래를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페르디난트 2세는 궁지에 몰렸다. 그는 발렌슈타인의 군사력이 필요했지만, 아들의 제위 계승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발목을 잡은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보낸 교활한 외교관, ‘회색 옷의 eminance(배후 실세)’라 불리는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페르 조제프 신부였다.
페르 조제프는 종교인의 온화한 가면 뒤에 날카로운 외교적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만토바 문제에서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해준다면, 프랑스가 황제의 로마 왕 선출을 지지할 것이며, 제후들을 설득해주겠다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그는 ‘평화를 위해’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는 제후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리슐리외의 진짜 목표는 합스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군사적 수단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페르디난트는 그 계략에 넘어갔다.
결국, 1630년 8월, 페르디난트 2세는 굴욕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는 제국의 모든 군대에 대한 최고 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다.
발렌슈타인은 자신의 영지인 메밍겐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모두가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했다. 그의 손에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있었고, 병사들은 황제가 아니라 그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황제 폐하의 결정에 복종하겠소.” 그는 자신을 찾아온 황제의 사절단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보헤미아의 일개 시골 신사로 돌아가, 내 영지를 돌보며 조용히 살겠소.”
그는 자신의 거대한 군대를 해산 절차에 넘기고, 화려한 마차 행렬과 함께 자신의 영지인 기친(Jičín)으로 떠났다. 그의 행동은 수수께끼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정말로 권력에 지쳤다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점성술의 예언에 따라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진실은 단 하나였다. 그는 뱀처럼 교활했고, 뱀은 허물을 벗고 더 강해져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후들이 자신의 부재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날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제후들은 승리를 자축했다. 독수리의 그림자가 걷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레겐스부르크의 연회장에서 축배를 들며,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축배를 깨뜨리는 소식이 북쪽에서 전해졌다. 마치 천둥처럼.
1630년 7월 4일, 스웨덴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1만 3천의 군대를 이끌고 포메라니아의 우제돔(Usedom) 섬에 상륙했다는 소식이었다.
북방의 사자가, 마침내 독일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레겐스부르크의 제후들은 처음에는 그 소식을 비웃었다.
“고작 1만 3천? 눈의 왕이 겨울 원정이라도 온 모양이군.”
“스웨덴 촌뜨기들이 틸리 장군의 베테랑 군대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몰랐다. 그들이 마주하게 될 상대는 또 다른 덴마크 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시대를 앞서간 군사 혁명가이자, 독실한 신앙과 냉철한 현실 정치를 겸비한, 30년 전쟁이 낳은 가장 위대한 영웅과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위대한 적을 상대할 자신들의 유일한 무기, 발렌슈타인을 스스로 내던져 버린 직후였다.
같은 시각, 스웨덴군 상륙지, 우제돔 섬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독일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투구를 벗고, 독실한 루터파 신도로서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의 주변에는 푸른 제복을 입은 그의 병사들이 조용히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북해의 거친 파도를 헤쳐온 피로와 함께, 자신들의 왕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서려 있었다.
“주여, 제가 이 땅에 온 것은 제 개인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옵니다. 당신의 이름이 모욕받고, 억압받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신음하고 있기에, 당신의 도구가 되고자 할 뿐이옵니다. 이 신성한 임무를 완수할 힘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친 그가 일어섰을 때, 그의 얼굴에는 종교적 열정뿐만 아니라, 냉철한 군주의 위엄이 함께 서려 있었다. 그는 35세의 젊은 왕이었지만, 이미 폴란드와의 오랜 전쟁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노련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북방의 사자’라 불렸지만, 그의 전쟁 방식은 사자의 맹목적인 용맹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과학과 혁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의 군대는 당시 유럽의 다른 군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용병이 주축인 다른 군대와 달리, 그의 군대는 스웨덴의 자유 농민들로 구성된 국민군이 핵심이었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왕과 조국, 그리고 신앙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 있었다. 그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 훈련받았고, 스웨덴 본국으로부터 체계적인 보급과 급료를 받았다.
그의 군사적 혁신은 더욱 놀라웠다. 그는 무거운 머스킷을 개량하여, 받침대 없이도 사격할 수 있는 경량 머스킷을 제식화했다. 병사들에게는 미리 화약과 탄환을 담은 종이 탄약을 보급하여 장전 속도를 세 배나 높였다. 그의 포병대는 ‘가죽 대포’라 불리는 혁신적인 경량 야포를 개발하여, 보병 부대와 함께 신속하게 기동하며 화력을 지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보병, 기병, 포병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사용하는 ‘제병협동전술’의 선구자였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 전쟁이 군사력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독일의 자유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나는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 이 땅에 왔다! 나는 합스부르크의 폭정과 로마 교황의 압제로부터 독일의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나의 검을 뽑았다! 나와 함께하는 자는 자유를 얻을 것이나, 나의 길을 막는 자는 폭군의 하수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포메라니아 공작 보이슬라프 14세였다. 늙고 우유부단한 공작은 황제와 스웨덴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슈체친으로 진군하여, 사실상 무력시위를 통해 보이슬라프에게 ‘동맹’ 조약을 강요했다. 포메라니아는 이제 스웨덴 군의 안전한 기지이자 보급로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개신교 제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두 제후, 브란덴부르크의 게오르크 빌헬름과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스웨덴 군의 등장을 경계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스웨덴이라는 새로운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들은 ‘무장 중립’이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스웨덴 군에게 영지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분노했지만, 인내심을 가졌다. 그는 독일 제후들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이기적인지 이해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겨울 동안 포메라니아에서 군대를 정비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 사이, 발렌슈타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제국군 총사령관이 된 늙은 여우 틸리는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스웨덴 군을 얕보았지만, 동시에 신중했다. 그는 스웨덴 군이 포메라니아에 고립된 채 굶주리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
1631년 늦겨울, 함부르크
야쿠프는 함부르크에서 스웨덴 왕의 상륙 소식을 들었다. 도시는 흥분과 기대로 술렁였다. 상인들은 새로운 전쟁이 가져올 사업 기회에 대해 떠들었고, 개신교 목사들은 설교 시간에 ‘북방에서 온 구원자’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야쿠프는 그러나 섣부른 희망을 경계했다. 그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화려한 등장이 어떻게 비참한 패배로 끝났는지를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연대기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등장을 기록했지만, 그의 평가는 신중했다.
그는 계속해서 상인 헨드릭 판 오스터펠트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헨드릭은 스웨덴 군의 등장을 하늘이 내린 기회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인맥과 자금을 동원하여 스웨덴 군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구스타브 왕은 덴마크 왕과는 다르다네, 야쿠프.” 헨드릭은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대금을 어음이 아니라 스웨덴 구리 광산에서 나오는 은화로 지불해. 그의 군대는 약탈을 하지 않고, 모든 물자를 정당한 가격에 구입하지.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거대한 사업이야!”
야쿠프는 헨드릭의 지시로 스웨덴 군 진영을 몇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이제껏 보아온 어떤 군대와도 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스웨덴 군의 야영지는 발렌슈타인의 혼돈의 도시와는 정반대였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고, 깨끗했다. 병사들은 지정된 시간에 기도하고, 훈련했으며, 도박과 과도한 음주가 금지되었다. 매 주일 아침이면, 왕 자신을 포함한 전군이 야외 예배에 참석했다.
야쿠프는 구스타브 아돌프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에,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말 그대로 북방의 사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화려한 갑옷 대신 수수한 가죽 옷을 입고, 직접 병사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했다. 그의 눈에는 독실한 신앙인의 열정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총명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야쿠프는 직감했다. 이 사람은 다르다. 그는 전쟁의 규칙을 바꿀 사람이다.
1631년 5월, 마그데부르크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고, 전쟁의 수레바퀴는 다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구르기 시작했다.
독일 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마그데부르크가 스웨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동맹을 요청했다. 그들은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분노했고, 구스타브 아돌프만이 자신들을 지켜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틸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그데부르크는 엘베 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약 이 도시를 점령한다면, 그는 스웨덴 군이 독일 중부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마그데부르크를 포위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마그데부르크를 구원하고 싶었지만, 그의 군대는 아직 틸리의 대군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수적으로 열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그데부르크로 가려면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영지를 통과해야만 했다. 두 선제후는 여전히 그의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었다.
그는 두 선제후에게 필사적으로 사절을 보내 설득했다. “마그데부르크가 무너지면, 다음은 당신들의 차례요! 지금 손을 잡지 않으면 우리 모두 공멸할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틸리의 보복이 두려웠고, 스웨덴 왕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들의 우유부단함이 마그데부르크의 운명을 결정했다.
1631년 5월 20일, 몇 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틸리의 군대는 마침내 마그데부르크의 성벽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30년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끔찍한 참사로 기록된다.
승리에 도취하고, 오랜 포위 공격에 굶주렸던 제국군 용병들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특히 틸리의 부관인 파펜하임 백작이 이끄는 부대는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은 도시로 쏟아져 들어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다. 광기 어린 학살이었다. 병사들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겁탈했으며, 아이들을 창끝에 꿰어 던졌다. 교회에 피신한 시민들은 교회와 함께 불태워졌다. 술에 취한 병사들이 횃불을 마구 던지는 바람에, 목조 건물이 많았던 도시는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다.
사흘 동안, 학살과 파괴는 계속되었다. 한때 ‘독일의 성모’라 불렸던 아름다운 도시는, 불타는 지옥으로 변했다. 3만 명에 달했던 시민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5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틸리 자신도 이 끔찍한 결과를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훗날 “마그데부르크의 참극은 내 병사들이 아니라, 신의 분노가 행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 광기를 막지 못했다. 아니,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참사가 다른 개신교 도시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가 되기를 바랐다.
마그데부르크의 참극 소식은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틸리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다. 공포가 아니라,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그데부르크의 정의!”
“마그데부르크를 기억하라!”
이 구호는 개신교 진영 전체를 하나로 묶는 슬로건이 되었다. 더 이상 중립은 없었다. 황제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목격한 이상, 이제는 싸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다.
마침내,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선제후들도 등을 떠밀리듯 결단을 내렸다. 틸리가 그들의 영지까지 위협하며 ‘콘트리부치온’을 요구하자, 그들은 마침내 구스타브 아돌프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늦었지만, 마침내 그가 원했던 것을 얻었다. 그는 이제 독일 개신교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등 뒤에는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강력한 군대가 함께하게 되었다.
1631년 9월 초, 구스타브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작센 연합군은 엘베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마그데부르크의 잿더미 위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늙은 여우, 틸리의 군대였다.
야쿠프는 함부르크에서 마그데부르크의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일지에 잿더미가 된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록했다. 그는 더 이상 이 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포장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신의 전쟁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을 위한 지옥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대기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1631년, 마그데부르크는 불탔다. 그리고 그 잿더미 속에서, 북방의 사자는 분노의 날개를 달았다. 세상은 이제 두 거인의 충돌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늙은 여우의 노련함인가, 아니면 젊은 사자의 혁신인가. 라이프치히 근교의 작은 마을, 브라이텐펠트의 들판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 될 전투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