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대의 사내는 자신의 성도 위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한때 유럽을 뒤덮을 듯 타오르던 두 개의 별이 이제 그 빛을 잃고 있었다. 그들의 광휘는 러시아의 끝없는 설원에 흡수되어 희미한 잔불처럼 깜박였다. 포식자는 먹이가 되었고, 사냥꾼은 스스로 판 함정에 갇혔다.
"속도의 제국은 공간의 제국에 패배했다."
사내는 기록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힘은 전례 없는 속도에서 나왔다. 적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돌파하고, 적이 군대를 집결시키기 전에 수도를 점령하는 능력. 그들은 시간을 지배함으로써 공간을 정복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공간은 시간을 집어삼켰고, 계절은 군대를 분쇄했다.
이제 이야기는 정복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 영광스러운 진군는 처절한 후퇴로 바뀌었고, 개선가는 얼어붙은 병사들의 비명으로 대체되었다. 그들이 애써 쌓아 올렸던 '무적'의 신화는 가장 먼저 얼어붙어 산산조각 났다. 그 신화의 파편들은 병사들의 얼어붙은 시체와 함께 눈 속에 묻혔다.
사내는 두 개의 시간선을 응시했다. 하나는 불타는 모스크바에서 니멘 강으로 이어지는 핏빛 퇴각로였고, 다른 하나는 볼가 강변의 폐허에서 시작된 거대한 포위망이었다. 모스크바에서의 후퇴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항복. 이것들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영혼이 죽음을 선고받는 순간이었다. 육신은 한동안 더 버티며 발버둥 치겠지만, 그들의 운명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얼어붙은 제국의 장송곡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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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10월 1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35일간의 악몽 같았던 모스크바 점령을 끝내고 마침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가 이끌고 나선 군대는 더 이상 유럽을 제패했던 '위대한 군대'가 아니었다. 10만 명으로 줄어든 병력에,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부상병, 민간인, 그리고 약탈품으로 가득 찬 마차들이 뒤섞인 거대한 난민 행렬이었다. 병사들은 여분의 탄약이나 식량 대신, 모스크바의 교회에서 뜯어낸 은촛대와 황금 성상, 귀부인들의 드레스와 값비싼 가구를 마차에 싣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정복자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남쪽의 미개척지이자 비옥한 칼루가 지방을 통해 퇴각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노장 쿠투조프에게 완벽하게 간파당했다. 쿠투조프는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프랑스 군의 진로를 막아섰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 군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이것은 전략적 패배였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러시아 군 주력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었다.
나폴레옹은 인생 최악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밤새도록 고민에 빠졌다. 쿠투조프와 결전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신들이 모든 것을 파괴하며 지나왔던 그 끔찍한 스몰렌스크 가도로 돌아갈 것인가. 다음 날 새벽,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북쪽으로."
그것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위대한 군대는 이제 스스로 만든 사막, 즉 모든 것이 불타고 약탈당한 황무지를 따라 행군해야 했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다. 11월 초, 기온이 급강하하며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름 군복 차림의 병사들에게 러시아의 겨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옥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낡은 군복을 뚫고 들어왔고, 밤이면 수백 명씩 잠을 자다 그대로 얼어 죽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서 함께 잠들었던 전우가 차가운 얼음 조각상이 되어 있는 끔찍한 광경이 매일 반복되었다.
굶주림은 모든 인간성을 파괴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상당한 말을, 다음에는 포병의 말을, 마지막에는 장교들의 말까지 모두 잡아먹었다. 고기가 떨어지자 말 가죽을 벗겨 불에 구워 씹었고, 그것마저 없자 양초나 가죽 탄약 주머니를 끓여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악의 금기가 깨졌다.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행렬의 양옆으로는 유령처럼 코사크 기병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늑대처럼 끈질기게 행렬을 괴롭혔다. 낙오하는 병사, 얼어붙은 손으로 총을 놓친 병사들은 여지없이 그들의 긴 창에 꿰뚫렸다. 공포는 군대의 규율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병사들은 총과 대포를 버렸고, 부상당한 동료를 길가에 내버려 둔 채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황제 나폴레옹 역시 더 이상 신화 속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두꺼운 모피 코트를 입고 말에서 내린 채, 병사들과 함께 눈길을 걸으며 그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초조함과 절망의 빛이 역력했다.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군대가 재정비될 수 있으리라 희망했지만, 그곳에 남겨진 보급품은 굶주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식량 창고가 열리자 병사들은 서로를 밀치고 짓밟으며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절망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악의 장애물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완전히 얼지 않은, 유빙이 떠다니는 베레지나 강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강의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서 세 개의 러시아 군대가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위대한 군대는 이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빚어낸 숭고한 희생이었다. 나폴레옹의 공병대를 이끌던 장 에블레 장군은 후퇴하면서 모든 부교 장비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몰래 가장 중요한 장비들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는 휘하의 네덜란드 공병 400명과 함께 얼음장 같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에 몸을 담근 채, 얼음 조각을 밀어내며 다리의 기초를 박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11월 26일, 마침내 두 개의 부교가 완성되었다.
다리가 놓이자, 나폴레옹의 정예 부대와 근위대가 먼저 강을 건너 서쪽 강둑에서 몰려오는 러시아 군을 막아섰다. 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뒤따르던 수만 명의 비전투원, 부상병, 민간인들이 다리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다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고, 짓밟고, 강물로 떨어뜨렸다. 러시아 군의 포탄이 무방비 상태의 군중 속으로 날아와 끔찍한 살육을 자행했다. 포탄에 맞아 부서진 마차와 사람들의 시체가 뒤엉켜 다리를 막았고, 그 위로 또 다른 사람들이 기어올랐다. 강물은 비명과 함께 빠져 죽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11월 29일 아침, 추격해오는 러시아 군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눈물을 머금고 다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쪽 강둑에 버려졌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불타는 다리를 향해, 혹은 얼음장 같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코사크 기병들이 그들을 덮쳤고, 베레지나 강변은 거대한 학살의 현장으로 변했다.
베레지나 도하 작전은 군사적으로는 성공이었다. 나폴레옹과 군대의 핵심 병력은 포위망을 탈출했다. 하지만 위대한 군대는 이곳에서 심장을 잃었다.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이 끔찍한 기억은 생존자들의 영혼에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남은 군대의 지휘권을 뮈라에게 넘기고, 단 몇 명의 측근만 데리고 썰매에 몸을 실어 파리를 향해 떠났다. 그는 파리에서 쿠데타 음모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제국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병사들에게는 황제가 그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으로 비쳤다.
황제가 사라진 군대는 이제 시체들의 행렬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영하 37도의 혹한 속에서 비틀거리며 니멘 강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니멘 강, 그들이 6개월 전 영광스럽게 건넜던 바로 그 강에 도착했을 때, 위대한 군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60만 대군 중, 살아서 강을 다시 건넌 사람은 고작 3만 명도 되지 않았고, 그중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위대한 군대'는 러시아의 설원 위에 영원히 묻혔다. 나폴레옹 무적의 신화는 베레지나 강의 얼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유럽 전역의 피지배 민족들은 이제 거인이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해방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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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여름,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히틀러는 남부 전선에 대한 대공세, '청색 작전(Fall Blau)'을 개시했다. 그의 목표는 코카서스의 유전이었고, 스탈린그라드는 그 목표를 위한 보조적인 역할, 즉 볼가 강 수운을 차단하고 독일군 주력의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만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숙적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는 곧 히틀러의 강박적인 집착의 대상이 되었다. 8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이 이끄는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 시 외곽에 도달했다. 루프트바페의 무차별 폭격으로 도시는 순식간에 불타는 폐허로 변했다.
히틀러는 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폐허가 된 도시는 오히려 방어자에게 천혜의 요새가 되어주었다.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이 이끄는 소련 제62군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 아래, 모든 건물, 모든 지하실, 모든 하수도를 요새 삼아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은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처절한 전투, '쥐들의 전쟁(Rattenkrieg)'으로 변모했다. 거대한 전략이나 기동은 의미가 없었다. 전투의 단위는 사단이 아니라 분대였고, 전선은 건물의 이쪽 방과 저쪽 방으로 나뉘었다. 병사들은 소총보다 수류탄과 단검, 야전삽으로 서로의 목숨을 끊었다. 거대한 트랙터 공장과 '붉은 10월' 제철소, 마마예프 쿠르간 언덕의 주도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고, 양측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제6군은 이 거대한 고기 분쇄기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히틀러는 매일같이 전황 보고를 받으며 미터 단위의 진격에 집착했다. 그는 이미 코카서스의 유전이라는 원래 목표는 잊어버린 채, 오직 '스탈린의 도시'를 점령한다는 상징적인 승리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지휘 아래 거대한 반격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도시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 제6군의 길게 늘어진 측면을 지키고 있는 약한 루마니아와 헝가리 군을 돌파하여, 제6군 전체를 거대한 포위망 안에 가두어 버린다는 대담한 구상,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을 세웠다.
1942년 11월 19일,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수천 문의 대포가 불을 뿜고, 수백 대의 T-34 전차가 얼어붙은 스텝 지대를 가로질러 진격했다. 변변한 대전차 무기도 없었던 루마니아 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어 흩어졌다.
불과 나흘 만인 11월 23일, 남쪽과 북쪽에서 진격해 온 소련군의 두 개 집단이 칼라치에서 만나 악수했다.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파울루스 장군의 제6군 전체와 제4기갑군의 일부, 약 30만 명의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의 폐허와 주변의 황량한 설원 속에 완벽하게 갇혔다. '가마솥(Kessel)'이 닫힌 것이다.
파울루스는 즉시 히틀러에게 포위망이 닫히기 전에 남서쪽으로의 탈출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직은 탈출할 연료와 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늑대 소굴'에 있던 히틀러는 격노하며 이를 거부했다.
"제6군은 현 위치를 고수한다! 나는 볼가 강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허풍을 믿었다. 괴링은 루프트바페가 공중 보급만으로 포위된 제6군을 완벽하게 지원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망상이었다. 혹독한 겨울 날씨와 소련 공군의 저항 속에서, 공수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다. 하루에 필요한 최소 500톤의 보급품 중, 실제로 도착한 것은 100톤에도 미치지 못했다.
스탈린그라드의 '가마솥' 안은 이제 나폴레옹 군대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지옥으로 변해갔다.
굶주림. 식량 배급량은 하루 빵 한 조각으로 줄었다. 병사들은 마지막 남은 말들을 모두 잡아먹었고, 곧이어 쥐와 까마귀를 사냥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를 핥아먹는 병사들도 있었다.
추위. 러시아의 겨울은 130년 전과 똑같이 무자비했다. 기온은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졌다. 동계 장비가 부족했던 병사들은 얇은 군복으로 버텨야 했다. 수만 명이 참호 안에서 조용히 얼어 죽었다. 부상병들은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았고, 상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절망.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이끄는 구원 부대의 '겨울 폭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병사들은 이제 자신들이 총통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더 이상 '위대한 독일'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죽음의 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1943년 1월 말, 소련군의 마지막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남은 독일군 진지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항복을 허가해달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지만, 히틀러는 "항복은 있을 수 없다"고 답하며 그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독일 역사상 항복한 원수는 없었으므로, 이는 사실상 자결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자살 대신 항복을 택했다. 1943년 1월 31일, 그는 폐허가 된 백화점 지하실의 사령부에서 부하들과 함께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며칠 뒤, 북쪽에서 저항하던 마지막 부대까지 항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이 났다.
히틀러는 라디오를 통해 제6군의 '영웅적인 전멸'을 발표하고, 독일 전역에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장군들에게 "어떻게 저런 남자가 원수가 될 수 있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권총으로 자신을 쐈어야 했다!"고 고함을 질렀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었던 30만 명의 병력 중, 9만 1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로 향하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했고, 전쟁이 끝난 뒤 살아서 독일로 돌아온 사람은 고작 5천 명에 불과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참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3제국의 조종(弔鐘)이었다. 독일 국민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총통이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며,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적 국방군의 신화는 볼가 강의 얼음과 함께 녹아내렸다. 나폴레옹이 베레지나에서 심장을 잃었듯,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척추를 잃었다. 제국의 긴 후퇴가 시작되었고, 그 종착역은 베를린의 폐허가 될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