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대의 사내는 지켜보았다. 소멸 직전의 별이 마지막으로 한 번, 격렬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그것은 생명의 빛이 아니었다. 죽음의 반향, 존재했었다는 것을 우주에 각인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거인이 관성에 의해 마지막 주먹을 한 번 더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그 주먹은 허공을 가르겠지만, 그 움직임 자체는 한때 그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가 되리라.
"의지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운명에 굴복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는 있다."
사내는 두 개의 마지막 불꽃을 응시했다. 하나는 지중해의 작은 섬에서 날아올라 파리의 하늘을 다시 한번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다른 하나는 동프로이센의 음울한 벙커에서 뿜어져 나와 아르덴의 눈 덮인 숲을 잠시 불태웠다.
백일천하(Les Cent-Jours)와 라인 강 수비 작전(Wacht am Rhein). 이름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그것은 이성적인 전략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향한 마지막 반항이자, 자신들의 신화를 스스로 완성시키려는 최후의 시도였다. 그들은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기어 나와, 자신들을 쓰러뜨린 세상의 턱에 마지막 일격을 날리고자 했다.
그들의 귀환과 반격은 적들에게 공포와 혼란을 안겨주었다. 잠시나마 세상은 숨을 죽였다. 혹시 괴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발악은 오히려 제국의 관 뚜껑에 마지막 못을 박는 망치질이 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힘과 희망, 그리고 젊은이들의 목숨을 하룻밤의 도박에 모두 쏟아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 사내는 이제 마지막 장을 준비했다. 워털루의 진흙과 베를린의 잿더미. 모든 신화가 끝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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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5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엘바 섬의 '황제'였다. 유럽을 호령하던 거인에게 주어진 것은 인구 1만 2천의 작은 섬과 700명의 근위병, 그리고 '황제'라는 조롱 섞인 칭호뿐이었다. 그는 포르토페라이오의 언덕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한때 자신의 '호수'라 불렀던 바다였다. 이제 그 바다는 영국 해군의 순찰선이 오가는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그는 패배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엘바의 왕처럼 행동했다. 그는 도로를 정비하고, 철광산을 개발했으며, 작은 해군을 창설했다. 그는 자신의 작은 왕국을 분주하게 다스리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늘 북쪽, 프랑스를 향해 있었다. 그의 독수리는 아직 날개가 꺾이지 않았다. 잠시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귀에는 프랑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속속 들어왔다. 연합국에 의해 왕위에 오른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는 뚱뚱하고 무능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룬 모든 것을 되돌리려 했다. 혁명 기간 동안 토지를 얻었던 농민들은 옛 귀족들이 돌아와 땅을 빼앗아갈까 두려워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 전역을 누볐던 수십만 명의 군인들은 새로운 흰색 왕정 깃발 아래 모욕감과 굴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삼색기와 그들의 작은 하사관, '르 프티 카포랄(Le Petit Caporal)'을 그리워했다.
한편, 빈에서는 승전국들이 전후 유럽의 지도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다툼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처럼 위태로웠다. 나폴레옹은 직감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1815년 2월 26일 밤, 그는 행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7척의 작은 배에 1,000여 명의 병사들을 나누어 태운 채 엘바를 탈출했다. 영국 순찰선의 눈을 피해 감행된 대담한 도박이었다.
3월 1일, 그의 작은 선단은 프랑스 남부의 골프-주앙 해안에 상륙했다. 그는 해변에 첫발을 내디디며 선언했다.
"독수리는 종탑에서 종탑으로 날아, 노트르담의 탑 위에 앉을 것이다!"
그의 파리를 향한 행군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되었다. 그는 군대로 프랑스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전설과 카리스마만으로 프랑스를 되찾았다. 그의 앞을 막아서는 군대는 없었다.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달려온 부대들은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모자를 벗어 던지고 "황제 만세!(Vive L'Empereur!)"를 외쳤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3월 7일, 그르노블 근교에서 펼쳐졌다. 루이 18세가 보낸 제5보병연대가 총을 겨누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폴레옹은 말에서 내려 홀로 그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던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그는 자신의 낡은 회색 코트를 열어젖히며 외쳤다.
"제5연대 병사들이여! 나는 너희들의 황제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너희들 중 너희들의 황제를 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여기 내가 있다!"
침묵이 흘렀다. 병사들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황제 만세!"라고 외치자, 둑이 터진 것처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총을 내던지고 달려와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의 손을 잡으려 아우성쳤다. 그들을 지휘하던 장교는 절망적으로 "황제 폐하..."라고 중얼거리며 칼을 바쳤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는 완전히 뒤집혔다. 한때 그를 "프랑스를 파멸시킨 괴물"이라 비난했던 미셸 네 원수는 루이 18세에게 "반드시 그를 쇠창살에 가두어 파리로 데려오겠다"고 맹세하고 남쪽으로 향했지만, 그는 병사들의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국 눈물을 흘리며 옛 주군에게 합류했다.
나폴레옹이 리옹에 입성했을 때, 그는 이미 다시 프랑스의 지배자였다.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짐을 싸서 벨기에로 도망쳤다. 3월 20일 저녁, 나폴레옹은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튀일리 궁에 입성했다. 엘바를 탈출한 지 불과 20일 만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군중과 옛 부하들은 그를 가마 태우듯 들어 올려 궁전 안으로 옮겼다. 그는 인파에 휩쓸려 거의 질식할 뻔했다.
그의 귀환은 기적이었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그는 평화를 원한다고, 프랑스는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유럽의 군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빈에 모여 있던 군주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인류 평화의 교란자'이자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를 타도하기 위한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다시 한번 10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프랑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군대를 재건했지만,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20만에 불과했다. 그는 연합군이 모두 집결하기 전에, 먼저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는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을 각개 격파해야만 했다. 그의 마지막 도박이 될 원정이었다.
6월 초, 그는 12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의 군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은 예전의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그는 극심한 위통과 치질로 고통받고 있었고, 종종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6월 16일, 그는 리니에서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을 격파했고, 동시에 네 원수는 콰트르브라에서 웰링턴 군을 막아섰다. 전술적인 승리였지만,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블뤼허의 군대는 섬멸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북쪽으로 후퇴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군이 동쪽으로 후퇴하여 웰링턴 군과 분리될 것이라고 치명적인 오판을 했다. 그는 그루시 원수에게 3만 3천의 병력을 주어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웰링턴을 향했다.
1815년 6월 18일, 브뤼셀 남쪽의 작은 마을 워털루 근처의 언덕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내린 폭우로 땅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포병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땅이 마르기를 기다리느라 공격을 정오까지 늦추었다. 이 몇 시간의 지연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전투는 프랑스 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보병대는 웰링턴 군의 중앙을, 기병대는 우그몽과 라에상트의 농장 요새를 공격했다. 웰링턴 군은 언덕 뒤편에 몸을 숨긴 채 필사적으로 버텼다. "밤이 오거나, 블뤼허가 오거나." 웰링턴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오후 늦게, 네 원수는 웰링턴 군이 후퇴한다고 오판하고, 황제의 명령도 없이 프랑스 기병대 전체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했다. 수천의 흉갑기병이 언덕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그것은 무모한 자살 공격이었다. 영국 보병들은 재빨리 방진(方陣)을 형성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총검의 숲에 부딪혀 부서져 내렸다.
바로 그때, 동쪽 지평선에 군대가 나타났다. 나폴레옹은 그것이 그루시의 군대이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의 선두 부대였다.
이제 나폴레옹은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 예비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최정예 황실 근위대를 투입했다. 근위대는 북소리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웰링턴의 중앙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이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땅에 엎드려 있던 영국군 보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외쳤다.
"이제야말로 너희 차례다, 얘들아!"
일제 사격이 근위대의 전열을 무너뜨렸다. 전설적인 근위대는 잠시 주춤하더니, 역사상 처음으로 등을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근위대가 후퇴한다!(La Garde recule!)"는 절망적인 외침이 전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군 전체가 공황에 빠져 무너져 내렸다.
나폴레옹은 넋을 잃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제국, 그의 신화, 그의 모든 것이 진흙탕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방진 속에 갇힌 채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왔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퇴위를 강요받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 '백일천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영국 함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영국 전함 벨레로폰 호에 올라타 항복했다.
그의 마지막 유배지는 대서양 한가운데의 외딴 화산섬, 세인트헬레나였다. 그곳에서 그는 회고록을 구술하며 자신의 전설을 완성시키다가, 1821년 5월 5일, 51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독수리는 마침내 날개가 꺾여 바위섬에 갇혔지만, 그의 신화는 그의 죽음과 함께 불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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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가을, 히틀러의 제3제국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바르샤바 외곽까지 진격했고, 서쪽에서는 연합군이 독일 국경인 지크프리트 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독일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고,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며,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패배는 이제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항복을 생각하지 않았다. 동프로이센의 '늑대 소굴'과 베를린의 총통 벙커를 오가며, 그는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7월 20일의 암살 미수는 그의 편집증을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장군들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의지'와 '직관'만이 독일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대담하고도 광적인 마지막 도박이 구상되었다. 그는 서부 전선에서 기습적인 대공세를 감행하여 연합군을 분열시키고,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그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연합은 부자연스러우며, 강력한 일격 한 방이면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와 같다고 믿었다. 서부 전선을 안정시킨 뒤, 모든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볼셰비즘을 격퇴한다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였다.
그는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영광을 재현하기로 결심했다. 공격 지점은 또다시 아르덴 숲이었다. 연합군이 방심하고 있는 가장 약한 전선을 돌파하여, 뫼즈 강을 건너 최종 목표인 안트베르펜 항구를 점령한다. 그렇게 되면 북쪽의 영국군과 남쪽의 미군을 분단시키고, 4개의 연합군 군대를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작전명은 방어적인 이름으로 위장되었다. '라인 강 수비 작전(Wacht am Rhein)'. 그는 이 작전을 위해 동부 전선과 독일 본토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마지막 정예 기갑 부대와 병력을 모두 끌어모았다. 25만 명의 병력과 1,000대가 넘는 전차 및 돌격포. 이것은 독일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전략적 예비대였다.
그의 장군들, 특히 룬트슈테트와 모델 원수는 이 계획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반대했다. 그들은 연료 부족과 연합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지적하며, 보다 현실적인 '작은 해결책'을 제안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모든 반대를 묵살했다.
"당신들은 독일 병사의 공격 정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소! 이 공격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그는 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모든 통신은 유선으로만 이루어졌고, 부대 이동은 밤에만 이루어졌다. 그는 또한 오토 스코르체니에게 미군 군복을 입고 영어에 능통한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후방에서 교란 작전을 펼치도록 명령했다.
1944년 12월 16일 새벽, 130년 전 나폴레옹이 벨기에 원정을 시작했던 바로 그 계절에,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수천 문의 대포가 아르덴 숲의 미군 전선을 향해 불을 뿜었다. 최악의 겨울 날씨 덕분에 연합군 항공기는 모두 지상에 묶여 있었다.
기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신병이거나 재충전 중인 부대가 대부분이었던 미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요아힘 파이퍼의 SS 기갑 전투단을 필두로 한 독일 전차 부대는 미군 방어선을 뚫고 깊숙이 돌파했다. 전선에는 거대한 돌출부(Bulge)가 형성되었다. '벌지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초반 며칠 동안 연합군 지휘부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국지적인 반격인지, 아니면 전면적인 대공세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미군 부대들은 후퇴하거나 포위되었고, 말메디에서는 SS 전투단이 포로로 잡은 미군 병사들을 학살하는 전쟁 범죄가 벌어졌다.
하지만 히틀러의 도박은 곧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는 미군 병사들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했다. 특히 모든 도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 바스토뉴에서는 미 제101공수사단이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항복을 권유하자, 사단장 대리 앤서니 매콜리프 준장은 역사에 남을 단 한마디로 답했다. "Nuts!(헛소리!)"
이들의 영웅적인 저항은 독일군의 진격 속도를 결정적으로 늦추었다. 또한, 독일 기갑 부대는 심각한 연료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군의 연료 창고를 탈취하여 진격을 계속하려 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12월 23일, 히틀러에게는 최악의 소식이, 연합군에게는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다. 며칠 동안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걷히고, 눈부신 겨울 햇살이 비친 것이다.
수천 대의 연합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좁은 도로에 갇혀 있던 독일 기갑 부대와 보급 행렬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아르덴의 하늘은 연합군 비행기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제공권을 상실한 독일 전차들은 이제 움직이는 관에 불과했다. 조지 패튼 장군이 이끄는 미 제3군은 남쪽에서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바스토뉴의 포위를 뚫었다.
1월 초, 히틀러는 마침내 공세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후퇴를 명령해야 했다. 그의 마지막 도박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독일은 이 공세에서 10만 명의 병력과 8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다. 이것은 더 이상 대체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전략적 예비대를 탕진함으로써, 서부 전선의 방어력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벌지 전투의 실패는 제3제국의 사형 선고와 같았다. 이제 독일 본토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남아있지 않았다. 1945년 1월 16일, 히틀러는 동프로이센의 '늑대 소굴'을 영원히 떠나 베를린의 총통 벙커로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거처이자, 그의 무덤이 될 장소였다.
그의 제국은 이제 베를린의 총리 관저 지하에 있는 몇 개의 콘크리트 방으로 축소되었다. 그는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군대를 움직이며, 배신자들을 저주하고, 독일 국민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았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명성을 영원한 신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마지막 발악은 아무런 신화도 남기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제국의 종말을 몇 주 앞당겼을 뿐인, 한 독재자의 광기 어린 자기 파괴의 발작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