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29 08화

다가오는 최후

by 남킹


천문대의 사내는 지도를 펼쳤다. 한때 두 거인의 발아래 평평하게 펼쳐져 있던 그 지도는 이제 그들을 삼키기 위해 사방에서 구겨지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바다가, 동쪽에서는 설원이, 남쪽에서는 산맥이 거대한 손아귀처럼 오므라들고 있었다. 제국은 더 이상 팽창하지 않았다. 수축하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해진 거인이 비틀거리며 자신의 심장부로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었다.

"모든 사냥은, 사냥꾼이 포위되는 순간 끝이 난다."

사내는 두 개의 시간선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함성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한 명의 황제와 한 명의 총통을 향한 만세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받았던 모든 민족들이 복수와 해방을 외치는 거대한 합창이었다. 라이프치히의 들판과 노르망디의 해변. 129년의 간극을 두고, 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한 마지막 사냥이 시작되고 있었다.

러시아의 얼음은 그들의 발목을 부러뜨렸지만, 그들의 숨을 끊어놓지는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사자였고, 상처 입은 사자는 가장 위험한 법이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세웠고, 최후의 발악처럼 포효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제 상대는 한두 마리의 들소가 아니었다. 세상 전체가 창을 들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사내는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는 '민족들의 전투(Völkerschlacht)'라 불리는 거대한 소용돌이였고, 다른 하나는 '가장 긴 하루(The Longest Day)'라 불리는 피의 새벽이었다. 무대는 달랐지만, 극의 내용은 같았다. 제국의 외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심장부를 향해 수만 개의 칼날이 날아드는 풍경. 최후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최후의 서곡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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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있었다. 그러나 파리는 더 이상 승리와 영광을 찬미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위대한 군대'가 소멸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거리를 떠돌았고, 그의 적들은 그가 없는 틈을 타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는 썰매를 타고 13일 밤낮을 달려 기적처럼 파리에 귀환했다. 그의 등장은 모든 반란의 기운을 잠재웠지만, 제국의 거대한 균열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과 프랑스 국민의 저력을 믿었다.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에너지로 새로운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18세, 19세의 징집병들을 긁어모았다. 사람들은 이들을 나폴레옹의 아내, 마리 루이즈 황후의 이름을 따 '마리 루이즈들(Marie-Louises)'이라고 불렀다. 그는 퇴역 군인과 국민 방위대를 소집하고, 해군 포병을 육군으로 전환시켰다.

불과 몇 달 만에, 그는 30만의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기적이었지만, 그 군대는 과거의 '위대한 군대'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백전노장의 고참병들은 러시아의 눈 속에 모두 묻혔다. 특히 수만 마리의 군마와 숙련된 기병대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새로운 군대는 용감했지만 경험이 부족했고, 기동력과 정찰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가 프랑스를 재건하는 동안, 유럽은 그를 향한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먼저 손을 잡았고, 영국의 막대한 자금 지원이 뒤따랐다. 한때 나폴레옹의 동맹이었던 스웨덴의 베르나도트(나폴레옹의 옛 원수)도 칼을 돌렸다. 그리고 모두가 오스트리아의 결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장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는 망설였지만, 결국 연합국의 편에 섰다. 이제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영국과 싸우는 동시에, 독일의 심장부에서 유럽 전체와 맞서 싸워야 했다.

1813년 봄, 나폴레옹은 그의 풋내기 군대를 이끌고 독일로 진격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5월, 뤼첸과 바우첸 전투에서 그는 연합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아우스터리츠와 같은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기병대가 부족했던 그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후퇴하여 다시 뭉쳤다.

여름 동안 잠시 휴전이 있었지만,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전쟁은 가을에 재개되었고, 전황은 나폴레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연합군은 이제 '트라헨베르크 계획'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주력 부대와의 정면 대결은 피하고, 대신 그의 원수들이 지휘하는 분견대를 각개 격파하여 그의 힘을 서서히 소진시키기로 했다. 이 전략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우디노, 맥도날드,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연이어 패배했다. 나폴레옹의 독일 동맹국들이었던 바이에른과 작센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10월,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인근에 병력을 집결시켜 결정적인 한판 승부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중앙집중적 위치를 이용하여 사방에서 몰려드는 연합군을 하나씩 격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연합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1813년 10월 16일,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투, '민족들의 전투(Völkerschlacht)'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의 19만 대군에 맞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연합군은 36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다. 수많은 독일계 국가들이 양편에 갈라져 싸웠다. 이것은 더 이상 왕과 황제의 전쟁이 아니었다. '독일의 해방'이라는 대의 아래, 민족과 민족이 서로의 운명을 걸고 충돌하는 거대한 싸움이었다.

전투는 사흘 동안 라이프치히를 둘러싼 광활한 평원과 마을에서 벌어졌다. 첫날, 나폴레옹은 남쪽의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어 전선을 돌파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의 예비 기병대 지휘관 뮈라의 돌격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북쪽에서는 프로이센의 노장 블뤼허 원수가 프랑스 군을 거세게 압박했다. 첫날의 전투는 양측에 막대한 피해만을 남긴 채 피비린내 나는 교착 상태로 끝났다.

둘째 날은 기묘한 고요함 속에서 흘러갔다. 나폴레옹은 전날의 격전으로 연합군이 지쳤을 것이라 판단하고, 장인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사절을 보냈다. 하지만 연합군은 그의 제안을 묵살했다. 그들은 단지 스웨덴 군과 러시아 군 예비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벌고 있었을 뿐이었다. 포위망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10월 18일, 최후의 날이 밝았다. 연합군은 모든 전선에서 총공세를 시작했다. 1,400문이 넘는 연합군의 대포가 라이프치히를 향해 불을 뿜었다. 프랑스 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오후,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건이 터졌다. 프랑스 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작센 군단 전체가 갑자기 프랑스 군을 향해 총부리를 돌린 것이다. 그들은 포를 쏘며 연합군 진영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뷔르템베르크 기병대마저 배신했다. 나폴레옹이 수년간 공들여 구축했던 독일의 위성 국가 시스템, 라인 동맹이 전투 한복판에서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군의 전선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퇴각로는 라이프치히 시내를 관통하여 엘스터 강을 건너는 단 하나의 다리뿐이었다.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후퇴하는 병사, 마차, 대포, 부상병들이 좁은 길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10월 19일 새벽, 혼란 속에서 한 하사관이 너무 일찍 다리에 폭약을 터뜨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다리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3만 명의 후위 부대는 강 동쪽에 고립되었다. 그들은 항복하거나, 강물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헤엄쳐야 했다. 폴란드의 영웅이자 프랑스 원수였던 조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신은 내게 폴란드의 명예를 맡기셨다. 나는 그것을 오직 신에게만 돌려드릴 것이다"라고 외치며 말을 탄 채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부상당한 몸으로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익사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였다. 그는 7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그의 독일 지배는 완전히 끝장났다. 라인 동맹은 해체되었고, 독일의 모든 영방 국가들이 연합국 편에 섰다.

나폴레옹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향해 처절하게 후퇴했다. 11월, 그는 라인 강을 건넜다. 그가 10년 넘게 호령했던 독일 땅을 마지막으로 밟는 순간이었다. 그는 튀일리 궁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진짜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1814년 초, 연합군은 라인 강을 건너 프랑스 본토 침공을 개시했다. 남쪽에서는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이 스페인을 넘어 프랑스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제국은 이제 자신의 심장부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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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은 사방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붉은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지나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척추가 부러진 독일군은 끝없는 후퇴를 거듭하며 막대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로마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독일의 도시들은 밤낮없이 쏟아지는 영미 연합군의 폭격에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었다.

히틀러는 동프로이센의 '늑대 소굴'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며 지도 위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단을 움직였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손은 통제할 수 없이 떨렸고, 등은 구부정했으며, 안색은 창백했다. 그는 불면증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강력한 약물에 의존했다.

그는 여전히 '최종 승리'를 믿었다. 그는 연합국이 곧 분열할 것이라고, 혹은 독일 과학자들이 개발 중인 '기적의 무기(Wunderwaffe)'가 전세를 역전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서부 전선에서의 연합군 상륙 작전이었다. 그는 이것을 '침공(Invasion)'이라 불렀다. 그는 연합군을 해안에서 격멸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에르빈 롬멜 원수를 서부 전선의 방어 책임을 맡은 B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프랑스 해안선을 따라 거대한 방어선, '대서양 방벽(Atlantikwall)'을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대서양 방벽은 히틀러의 선전과는 달리 거대한 허상에 불과했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을 완벽하게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롬멜은 상륙이 해안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믿고, 해변 자체에 지뢰와 장애물, 벙커를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의 상관인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일단 상륙을 허용한 뒤, 내륙에서 기갑 예비 부대로 격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휘관들의 의견 대립 속에서, 히틀러는 우유부단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기갑 사단의 대부분을 내륙에 배치했지만,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자신만이 갖도록 했다. 전선 지휘관들은 총통의 허가 없이는 단 한 대의 전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결정은 훗날 재앙의 씨앗이 된다.

연합군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기만 작전, '포티튜드 작전(Operation Fortitude)'을 펼쳤다. 그들은 가짜 전차, 가짜 비행기, 가짜 무전 통신을 이용하여 히틀러와 독일군 최고 사령부가 상륙 지점을 노르망디가 아닌, 영국과 가장 가까운 파드칼레로 확신하게 만들었다. 히틀러는 이 미끼를 완벽하게 삼켰다. 그는 최정예 부대인 제15군을 파드칼레에 묶어두었다.

1944년 6월 초, 프랑스 연안의 날씨는 최악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쳐 상륙 작전은 불가능해 보였다. 롬멜은 당분간 상륙은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독일로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연합군 최고 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기상 예보관으로부터 6월 6일 새벽, 단 몇 시간 동안 날씨가 잠시 호전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역사상 가장 무거운 결정을 내렸다.

"오케이, 시작하자.(Okay, let's go.)"

1944년 6월 6일 새벽, '가장 긴 하루(The Longest Day)'가 시작되었다. 15만 명이 넘는 연합군 병사들이 5천 척의 함선에 나뉘어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1만 1천 대의 항공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공수부대원들이 적진 깊숙이 낙하했다.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해안 방어 부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연합군의 화력 앞에 무너져 내렸다. 특히 오마하 해변에서는 미군이 끔찍한 피해를 입었지만, 병사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간신히 교두보를 확보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독일군 지휘 체계는 마비 상태였다. 히틀러는 베르히테스가덴의 별장에서 잠들어 있었다. 상륙 보고가 올라왔지만, 그의 부관들은 감히 그를 깨우지 못했다. 그들은 총통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했다. 룬트슈테트와 다른 장군들은 이것이 파드칼레 상륙을 위한 양동 작전이라고 확신했다.

히틀러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그는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며 상황 보고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이것이 진짜 상륙이 아니라고 믿으며 껄껄 웃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군! 놈들이 드디어 우리 함정 속으로 들어왔어!"

그가 마침내 서부 기갑 집단(Panzer Group West)의 출동을 허가한 것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연합군은 해안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고, 하늘을 지배하는 연합군 전투 폭격기들은 낮 동안 움직이는 모든 독일군 전차를 사냥했다.

노르망디 상륙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의 전투는 끔찍한 소모전이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의 울창한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자연 방벽, '보카주(Bocage)' 지대에서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히틀러의 제국은 이미 다른 쪽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지 불과 2주 뒤인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3주년이 되는 바로 그날, 소련군은 동부 전선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공세,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을 개시했다.

독일군 지휘부는 서부 전선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기에, 동부 전선에서의 대공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240만 명의 소련군과 5,200대의 전차가 독일 중부 집단군을 향해 돌진했다. 중부 집단군은 불과 몇 주 만에 문자 그대로 지도상에서 지워졌다. 35만 명의 독일군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것은 스탈린그라드보다 훨씬 더 큰, 독일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였다.

독일은 이제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거대한 강철의 집게발에 허리가 잘릴 위기에 처했다.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이 겪었던 악몽이 1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히틀러에게 재현되고 있었다. 8월, 노르망디의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팔레즈에서 독일 제7군을 포위 섬멸했다.

8월 25일, 파리는 해방되었다. 히틀러는 파리 군정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에게 "파리가 적의 손에 넘어갈 때는 폐허가 되어 있어야 한다"며 도시 파괴를 명령했지만, 콜티츠는 그 미친 명령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이제 프랑스와 벨기에를 넘어 본토의 방어선인 지크프리트 선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한때 유럽 대륙 전체를 호령했던 총통은 이제 자신의 벙커 안에서 사방에서 조여오는 포위망을 느끼며 최후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제국의 외벽은 무너졌고, 이제 남은 것은 심장부를 향한 마지막 공격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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