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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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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Aug 18. 2023

6. 둘, 둘, 셋 (3)

    철컥-

    "다녀왔습니다."

    아차, 정화는 고독의 세계 속에 빠져있느라 벌써 시간이 저녁때가 된 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직 식사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정화는 당황감과 머쓱함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줄래? 아직 저녁밥을 못했거든."

    정화의 맑은 웃음에 따라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미연 언니도 덩달아 웃으며 대꾸했다.

    "같이 하자. 옷 갈아입고 올게."

    오늘의 저녁 메뉴는 간장계란밥. 정화가 냉동실에 얼려둔 밥을 데우는 동안 언니는 계란 프라이를 굽는다. 정화가 국그릇과 밥그릇 하나씩을 꺼내 밥을 나눠 담으니 언니는 그 위에 계란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정화가 간장 한 스푼을 두르면 언니는 그릇에 숟가락을 꽂아 협탁으로 가져간다. 죽이 척척. 금세 준비를 끝낸 둘은 협탁 앞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는다. 숟가락으로 밥을 쓱싹쓱싹 비비는 언니와 달리 정화의 몸은 베베 꼬이고 있다. 사실 정화는 아까 전부터 이미 입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결국 정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나 말이야. 커피를 배우고 싶어졌어."

    "커피? 아, 그러고 보니 너 커피 좋아했었지 참."

    "맞아. 지금까지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엄마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커피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그러게. 우리 학교에도 커피를 배우는 학과가 있는지 모르겠어. 네가 궁금하다면 알아봐 줄게. 그렇지만 등록금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어쩜 좋지?"

    미연 언니는 뜬구름 위에 동동 떠있던 정화의 고민을 현실 세계로 데려와주었다. 언니의 말마따나 커피를 배우려면 그만한 배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정화는 땡전 한 푼 없는 처지였다. 오히려 며칠 째 재워주고 먹여주는 미연언니에게 돈을 주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 마당에 공부라니. 정화는 자신이 생각해도 철없는 소리를 내뱉은 것만 같아 자책감 비슷한 마음이 일었다.

    언니도 삶의 여유가 있어서 정화에게 베풀어 주는 게 아니었다. 미연 언니네 집 사정도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언니네 아버지는 홀로 제주에서 과일가게를 하시면서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만 지원해 주실 수 있었기에 언니는 매번 장학금을 받기 위해 죽어라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화는 하루라도 빨리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상황. 즉, 당장 먹고 살 돈을 버는 것부터가 급선무였다. 정화는 방금 내뱉은 말이 후회스러웠다. 공부는 무슨. 배부른 소리.

    그때 미연 언니가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대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너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남은 유산 같은 건 없었어?"

    "응. 없어. 오히려 학교랑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빚더미에 올랐을지도 몰라."

    "하긴, 오래 아프셨으니."

    언니는 한 입 크게 밥을 물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씹어대기 시작했다. 치아가 딱딱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부엌이 된 집 안에서 경쾌하게 울렸다.

    딱, 딱, 딱, 딱, 딱, 딱, 악! 언니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제주도에서 살던 집은 어떻게 하고 왔어?"

    제주도에서 살던 집? 어떻게 하다니? 정화는 언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언니는 정화의 무응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알을 굴려대며 말했다.

    "네가 살던 집 말이야. 아직 그대로 있는 거 아니야? 그럼 그 집을 팔면 되겠네! 그러면 정화 너, 유학도 갈 수 있을지도 몰라!"


    미연 언니는 정화의 손을 붙잡고 방방 흔들어대더니 학교에 가서 유학 프로그램에 대해 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화에게 미션을 주었다. 바로 동사무소에 가서 제주도 집의 행방을 찾아오는 것. 다음날 아침 동사무소에 간 정화는 꽤나 놀라운 대답을 들었다. 이미 제주도의 집이 정화의 명의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대체 왜 이런 걸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 이 또한 당신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슬퍼할 내 모습이 걱정되어서였을까.

    동사무소에 다녀왔을 뿐인데 정화의 눈 앞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있었다. 집에 돌아온 언니와 정화는 기쁜 소식을 나누었다. 정화는 언니에게 이미 제주도의 집이 자신의 명의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고, 언니는 정화가 유학을 갈만한 나라가 몇 군데나 있다는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 둘은 다음날 아침부터 서둘러 언니가 다니는 대학의 교환학생 상담 센터를 찾았다. 언니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본인이 세계경제에 뜻이 있어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싶다며 상담을 받았고, 정화는 친동생으로서 함께 유학을 떠나는 척 연기를 도왔다. 상담사는 커피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정화를 위해 베트남을 추천해주었다. 세계 최고의 커피 강국은 이탈리아이지만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위치가 가까우며, 유학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에 정화가 커피를 배우기 적합한 환경일 것이라고 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부동산에 가서 집을 팔고, 받은 돈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이 모든 과정은 미연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정화에게 언니는 일생의 은인이었다. 언니가 없었더라면 집을 내놓지도 못했을 것이고, 여권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며, 어학원을 등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화가 베트남으로 떠나는 날, 언니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던 전공 수업을 빼먹고 공항에 동행해 주었다. 두 소녀는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훔치며 언젠가를 기약하자는 말만 수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정화의 유학기가 시작되었다. 정화는 처음 베트남 공항에 내렸을 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단다. 꿈을 찾아 맨 몸으로 떠나온 당찬 소녀에게 해외 살이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덥고 습한 날씨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숨이 턱, 턱, 막히는 날씨. 추위를 많이 탈지언정 여름은 거뜬히 보내오던 정화에게도 베트남의 열대기후는 상당히 버거운 상대였다. 이후에 바리스타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그러한 날씨 덕분에 강렬한 씁쓸함과 풍미를 가진 원두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정화는 매일 오전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같은 건물 1층의 커피 학원에서 바리스타 수업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학은 부잣집 남자아이들만이 갈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에, 정화와 마음을 나눌 미연언니 같은 여자친구는 없었으며, 정화처럼 전 재산을 털어 유학을 온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체구가 작고 가난한 꼬질이는 외톨이가 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났을까. 정화 주위는 늘 커피 향에 홀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정화가 커피를 타면 같은 원두를 써도 유달리 그 향이 깊고, 저 멀리 까지 퍼졌으며, 산미를 싫어하는 사람도 정화가 만든 커피에서 느껴지는 산미의 매력에서는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화의 재능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노력까지 더해지니 시간이 흐를수록 주위에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친구들은 원두가 정화를 편애한다는 질투어린 말장난을 해대었다. 글쎄,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학원의 그 누구도 정화만큼 원두의 곁에 오랫동안 머물러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었으니. 원두도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정화를 제일 사랑해준 것이 틀림 없었다.

    정화는 가진 돈이 많지 않았기에 반년 정도만 생활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야 했지만, 바리스타 선생님께서 재능을 아까워하여 신호등 건너 베트남 커피 전문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리하여 정화는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그 먼 타국에서 알아주는 한국인 바리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 정화는 제 몸 뒤에서 꾸물거리는 풍선을 숨기느라 고생 중이다. 그 풍선은 손님을 마주할 때마다 정화의 뒤통수 위로 붕-붕- 떠오른다. 접히지도, 구겨지지도 않는다.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다가 펑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에게 어울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손님의 모습이 보인다. 풍선 안에서 진한 커피와 라테의 조화가 절정을 이루는 코르타도의 향을 입고 있던 손님에게, (표현이 과격하지만) '고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바쳐야 하는 순간에는 서러움까지 느껴지더란다. 하지만 바리스타는 손님의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법. 감히 손님께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른한 오후 두 시였다. 튀어나온 눈썹 뼈 아래 짙게 파인 눈, 그 안의 암갈색 눈동자, 조각상처럼 날렵하고 큰 코, 입가를 다 덮을 정도로 수북한 수염을 가진 외국인 손님(여기 베트남에서는 정화도 외국인이었지만, 이 손님은 '정말' 외국인이었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정화는 아직까지도 '안녕하세요'를 Hello라고 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도 모른 채 내뱉는 말이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게 카운터 직원의 소양이란다. 그래서 정화도 기계적으로 How are you? 하는 버릇이 들어버렸다.

    "반가워요. 음..."

    외국인 손님은 수북한 털을 스윽, 슥 만져대며 고민하고 있었다. 정화의 마음속에는 당연하게도 풍선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슬며시 뒤통수 위까지 올라온 풍선 안을 들여다보니, 어디 보자... 이 손님은, 수염에 우유거품을 살짝씩 묻혀가며 카푸치노를 음미하는 모습이 보인다. 뙤약볕 아래의 산타클로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정화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희미하게 일그러진,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손님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메뉴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렵네요."

    문득 정화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선 안에서만 봤던, 자신이 만든 카푸치노를 마시는 손님의 '진짜' 모습이 보고 싶어 졌다. 정화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메뉴를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정말요? 영광인걸요."

     영광이라니. 진정 영광인 사람은 저란 말입니다! 정화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화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님께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한 후,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카푸치노를 만들어내겠다는 다짐을 안고 커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우유와 거품을 만들기 위해 비커에 우유를 담는다. 원래 카푸치노는 우유와 거품의 비율이 1:1이지만, 오늘의 손님은 머그잔 안이 몽글몽글한 거품으로 가득한 카푸치노가 어울리므로 스티밍을 미세하게 더 하여서 거품의 비율을 10% 정도 더한다. 비커를 잠시 내려두고 천장에서 머그잔을 꺼낸다. 잔을 데우기 위해 따뜻한 물을 붓고 버리기를 두 번 반복한다. 따뜻해진 머그잔에 에스프레소 샷을 내려 담는다. 섬세한 손길로 비커 안의 우유를 혼합한다. 넘칠 듯 말 듯 올라와있는 하얀 거품 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시킬 수 있도록 녹차가루와 시나몬가루를 번갈아 뿌리는 정화의 센스까지 더하면 세상에 하나뿐인 '한 여름의 카푸치노' 완성이다.

    정화는 공 들여 그린 라테아트가 망가질까 손님이 있는 자리까지 느릿느릿 걸어간 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식탁 위에 커피를 올렸다. 다행히 트리의 모양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오,"

    손님은 카푸치노의 모양새를 보고 가벼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음!"

    커피를 한 입 마신 손님은 고개를 들어 깊은 눈을 훤히 보이며 감탄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커피를 연달아 마셔대고는 말했다.

    "참으로 부드러운 카푸치노예요. 특히 거품 위에 뿌려진 가루와 커피의 조화는 완벽하군요. 시나몬의 퀴퀴한 향과 만났을 때는 풍미 있는 카푸치노가 되었다가, 이렇게 180도 돌려서 먹으면 향긋한 녹차의 향이 담겨 산뜻한 카푸치노가 되니까, 마치 끊임없이 황홀한 코스 요리를 ‘선사’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려요. 카푸치노를 꼭 드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저는 마크라고 해요. 이태리에서 원두를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요즘 베트남 원두의 인기가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두를 체험해 보려고 왔습니다. 이곳 베트남에 와서 먹은 원두는 강렬한 매력이 있어요. 하지만 때로는 그 향과 맛이 너무 진해서 부담스럽기도 하더군요. 커피 전문가로서 커피는 마셔야겠고, 아침부터 두 잔이나 마시고 와서 진한 커피는 그만 마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완벽한 밸런스의 커피를 만날 수가 있다니요."

    그렇게까지? 정화는 그렇게까지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수북한 턱수염에 크리스마스가 떠올랐을 뿐이고 거기서부터 이어진 생각의 고리를 담아 카푸치노로 표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마크라는 사람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듯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선물은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니 정화는 그저 고개를 으쓱하며 웃어 보이고 말았다.


    그는 그 이후로 매일같이 정화의 카페에 들러 커피를 추천받았다.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정화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만 가득하여 커피를 선사했다. 마크는 어떤 커피를 내어주어도 눈을 댕그랗게 뜨며 깜짝 선물처럼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이다. 2주가 지났을까. 어김없이 정화가 선사해 준 커피를 마시던 마크가 정화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다시 이태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혹시 저와 함께 이태리에 가시겠어요? 당신의 솜씨라면 커피의 본고장에서 빛을 발하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원두를 공급하는 몇몇 카페를 소개해 드릴게요. 마음에 드는 곳에서 본인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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