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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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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Aug 23. 2023

6. 둘, 둘, 셋 (4)

    꿈만 같았다.

    '나, 이탈리아로 떠난다니.'

    꿈만 같다는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없이 멀고 높은 꿈이었다. 누군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색연필이 바라보는 구름의 세상처럼 이질적인 공간의 경계를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릴 수는 있어도 닿을 수는 없는 일. 그러니 탐욕 따위는 가질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한 층 더 이질적인 황홀함은 무엇일까. 마치 이탈리아로 가는 것이 평생의 예견된 운명 그 자체이기에, 자연의 순리처럼 유려하게, 우주의 모든 기운이 정화를 이끌어주고 있는 듯했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이탈리아로의 여행, 그 문턱에 발을 딛고야 만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예술과 역사의 향연, 화려한 색채로 물든 이탈리아의 풍경은 정화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매혹으로 다가와서 이 감정을 잊어버릴 미래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날개를 단 제삼자가 되어 거리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을 꺼내볼 때마다 발산하는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을 텐데.

    정화가 마음속으로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마크는 정화의 거처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연락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마크는 한숨이 섞인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더니 한 아주머니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마크는 그 아주머니를 고모라고 불렀다. 이 동네는 한 다리 건너 서로 다 아는 사이라며. 그 둘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나 늦어있었기에 정화는 짐도 풀지 않은 채로 고모가 만들어주신 토마토 스프를 먹고는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날,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던 마크는 정화에게 동네를 소개해주겠다며 아침 일찍 찾아왔다. 그는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거리 앞에 서서 본인의 원두를 납품하고 있는 카페 세 곳을 가리켰다. 미리 말하자면, 정화는 이 중 하나의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동네에서 제일 큰 대형 카페. 랜드마크. 취급하는 원두의 종류, 무려 일곱 가지.

    정화는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천창과 광활한 너비, 그 안에서 드립 커피를 내리는 열댓 명의 직원, 거진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손님들의 아우라에 기가 죽으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은 땅 위의 신전이었다.

    이 곳이 가진 무엇보다도 강렬한 매력은 다양한 원두를 접할 수 있다는 것. 바리스타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풍요로운 요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원두만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날의 온도나 습도에 따라 브루잉 방법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그러니까 원두의 종류가 많아진다는 것은 예민한 아이 열댓 명이 좋아할 반찬 스무개를 만드는 것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자, 정화의 실력 향상에 무한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두 번째. 이탈리아 20대 청년들의 명소. 핫플레이스. 매달 선보이는 최신 커피.

    사실 정화는 첫 번째 카페보다는 이곳에서 더욱 강한 끌림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있었다고나 할까. 본인 또한 20대이기도 하고, 특히나 새로운 메뉴 개발, 곧 창의력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손님을 볼 때마다 풍선처럼 떠오르는 메뉴 중에 하나씩만 골라 선보이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크의 말로는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정화의 또래 친구들이라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크와 함께 세 번째 카페 앞에 섰을 때 정화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원 테이블의 작은 카페, 그보다는 다방. 주인 할머니가 허리 수술을 하셔서 재활치료를 받으셔야 함. 그 시간 동안 카페를 지키는 것이 주요 업무.

    작은 카페가 그 앞을 지키는 큰 나무에 은은하게 감싸이니 풀림 없이 흐릿한 존재감이 흘끗, 일렁이고 있었다. 나뭇잎에 슬쩍 가려진 간판을 빤히 쳐다보는 정화에게 마크가 말했다.

    "le undici. 이태리어로 열한 시라는 뜻이에요."

    왼쪽 눈을 찡그려 감고 눈앞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니 카페는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아담한 크기이다. 샛노랗게 색칠되어 있는 벽, 그 위로 초록색 천막이 삐죽거린다. 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창문 옆 귀퉁이에 작은 문이 있다. 갈색의 문고리를 당겨 문을 여니 더욱 진한 갈색의 큰 식탁이 눈을 사로잡는다. 방의 크기에 비해 식탁의 크기가 매우 커서 안쪽 자리는 체구가 작은 사람만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듯 보인다. 식탁에 오밀조밀 모여 앉으면 8명까지 앉을 수 있겠군.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커피를 만드는 작은 부엌이 있다. 부엌 끝 모서리에 둔 간이 의자에 앉은 할머니는 마크와 정화를 보며 미소 짓는다. 문 앞에 서있던 마크와 정화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 의자와 벽 사이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따뜻한 라테 두 잔 주세요."

    마크는 카페에 처음 온 정화를 위해 이곳에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카페라테를 두 잔 주문해 준다. 정화는 메뉴판이 없는 이곳에서 대신 주문을 해준 마크의 배려에 가벼운 목례로 고마움을 표한다. 할머니는 뒤를 돌아 커피를 제조한다. 정화는 느긋한 마음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11시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아무래도 식탁에 계속 눈이 간다. 그러고 보니, 별 일 아닌 듯, 오늘도 어김없는 듯, 늘 이 시간에 들리는 단골손님, '햇살'이 찾아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구나. 그 옆에는 카페 앞 큰 나무가 데려온 그늘이 햇살 옆에 꼭 붙어 부비적거리고 있다. 햇살이 앉은자리는 나른하고 따스한 오전 11시, 그늘이 앉은자리는 선선한 밤공기가 흩날리는 오후 11시 같았다. 식탁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그늘의 자리에는 꿉꿉한 종이 냄새가, 햇살의 자리에는 햇볕에 바싹 말린 빨래의 향기가 풍긴다. 사이사이로 할머니가 내린 커피의 내음까지 한데 모이니 황홀한 삼중창이 날개짓을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화가 꿈꿔왔던 카페였던 것이다.


    정화가 카페라테를 다 마시기도 전에 이곳에서 일하겠다고 외치자, 할머니는 대답으로서 두 가지 주의사항을 건네주었다.

    첫째, 원두를 태우지 말 것. 갓 내린 커피 샷을 머그잔에 옮기지 않으면 뜨거운 스테인리스 잔 안에서 원두가 탈 수 있으므로 미리 샷을 내려두지 말라는 당부였다. 정화가 베트남에서 일하고 왔다는 것을 안 사장의 이유 있는 염려였다. 실제로 정화는 이전 카페에서 점심시간마다 몰려드는 회사원 손님들을 감당하기 위해 스무 개가 넘는 샷을 내려두기도 했기에 할머니의 당부를 꼼꼼히 명심해 두었다.

    둘째, 주문을 하지 않는 손님을 내쫓지 말 것. 이 카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따스한 분위기와 선선한 공기을 마시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햇살의 옆자리에 앉은 정화는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도 아니니,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자리를 안내해 주고 마음껏 머무를 수 있도록 재촉할 것 없다 하셨다.


    정화가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사건'은 이 집 단골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다들 할머니가 어디 아프신 거냐는 둥, 카페 문을 닫는 것이냐는 둥,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화는 원체 성실하였음에도 손님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하여 더욱 열을 다해서 일했다. 자신의 재능을 힘껏 발휘하여 손님 각각의 취향을 더욱 세밀하게 파악하고, 최상의 맛을 선사해내었다. 예컨데 같은 카페라떼라 할지라도 손님에 따른 고유의 개성을 담아내는 등의. 이로써 손님들은 정화에게도 정을 품기 시작했고 정화 또한 매 시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정을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화는 카페의 일부로 물들어있었다.


    어느날부터인가 정화 마음속에는 유달리 맴도는 아주머니가 생겼다. 매주 월요일마다 찾아오는, 주름에 비해 흰머리가 많은, 빨간 안경을 쓴. 그를 보면 정화가 어린 시절 마주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닮은 구석이 거의 없는데도, 그럼에도 그녀는 정화를 엄마와의 추억 속으로 빠트렸다.

    그때의 엄마는 매일 커피를 타 마셨지. 중학생 때부터는 내가 커피를 타주기 시작했었는데. 곧 엄마는 아프다가,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다가, 결국 떠나갔어.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했는데.

    정화의 생각 매듭은 어떠한 식으로 풀려도 늘 후회를 뱉어내었다. 그래서인지 아주머니가 카페에 올 때면, 끝내 엄마가 마시지 못했던 둘둘셋 커피를 내려드리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점차 커져서 허리춤에 묵직이 매달렸을 때, 퇴근을 하던 정화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한인마트에 가서 프림을 샀다. 설탕은 카페에 있는 걸 쓰기로 하고, 커피가루는 에스프레소로 대체하기로 했다. 다음날 출근한 정화는 에스프레소를 내린 후 프림과 설탕을 각각 두, 세 스푼 넣었다. 마지막으로는 따뜻한 물을 조금 더. 적합한 농도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년을 타왔던 커피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잊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냄새만으로도 맛이 느껴진다. 아직 토요일이지만 혹시라도 아주머니가 갑자기 오시지 않을까? 문득 이곳에 들리지 않으실까?라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던 정화였다. 물론 아주머니는 이변 없이 월요일에 나타나셨다. 그리고서는 늘 앉으시던 안쪽 자리(체구가 작으셨다, 이는 몇 가지 안 되는 엄마와 닮은 구석이었다.)에서 가져온 신문을 읽는다. 정화는 에스프레소를 진하게 내린 후 준비한 프림을 두 스푼, 설탕을 세 스푼 넣는다. 따뜻한 물을 쪼르륵 붓는다. 둘둘셋 커피의 향이 난다. 정화가 아주머니의 앞으로 커피잔을 밀어주니, 커피의 향기가 아주머니에게 노크한다. 그는 주문하지도 않은 커피에 멈칫하고 정화를 바라본다. 정화가 말했다.

    "선물이에요.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아주머니는 양손으로 커피잔을 어루만지듯 잡고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시더니 호록하는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셨다. 그가 고요히 말했다.

    "당신의 커피에는 힘이 있군요."

    정화는 잃어버린 엄마를 보았다. 울컥 넘쳐오르는 반가움과 함께.


    이날의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하여 먼 훗날 그들의 나이를 쫒는 정화의 마음속에까지도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정화는 더 이상 '정화'로 불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내리는 순간에는, 늘, 여전히 먼 타지에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커피를 내리던 정화가 존재한다. 그 시절 정화는 할머니의 카페에서 거진 10년을 일했다. 쇠약해진 할머니가 더 이상 카페를 운영하지 못하게 되셨을 때, 정화는 자신에게 카페를 물려주시려던 할머니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정화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참된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낯설어진 그곳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정화는 일종의 조국에 대한 의무감 혹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커피가 가진 특별한 힘. "힘내"라는 말 한마디보다 더욱 무거우며, 강렬하고, 뜨거운 힘이 자신의 커피에서 방출되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한국으로 돌아가, 스무 살에 길거리를 배회하던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유대의 안경을 쓰고 보면 서로 같아보이면서도, 사실 모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커피를 건넬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정화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햇살 옆에 앉을까, 그늘 품에 숨을까. 오늘도 제시간에 커피 오마카세 문을 연 정화는 손님이 오기 전까지 아름다운 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 햇살 옆에 앉는다.

    -따랑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도 첫 손님은 부영씨군요. 이리 앉아요."

    정화는 그늘 품에 숨어 앉은 부영에게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캐러멜마키야또를 선사한다. 커피를 받은 부영이 말했다.

    "이 커피에 맛이 들려서 큰일이에요. 살도 찌는 것 같고요. 달리기라도 해야 하나."

    사장은 한순간에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이 말했다.

    "부영씨, 혹시 제가 운동 메이트를 만들어드릴까요?"

    가을씨, 그대의 반려견을 키울 마땅한 사람을 찾은 것 같네요.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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