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도시락의 비법

by 초름

매일 밤 내일의 점심을 준비하는 일은 꽤나 귀엽습니다. 내가 내일 뭐가 먹고 싶을 줄 알고 냅다 계란샌드위치를 골라버리다니! 그렇게 내일의 저는 어제의 제가 열심히 ‘오마카세’한 도시락을 먹습니다.

저는 원래 박 씨 가문의 ‘악랄한 방구석 장금이’ 이거든요. 그런 제가 점심을 한 입 먹고 나서 하는 평은 주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 정도면 맛있네~”

정말 맛있습니다. 밥이 살짝 굳어있었지만요. 간을 안 보고 만들어서 조금 싱거웠지만요! 이런 귀여운 점심이라면 평생이라도 먹을 수 있겠어요.

그런 제가 모종의 이유로 요리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가지볶음을 만들다가... 칼에 쓱싹... 쓱싹은 아니고 쓰윽 정도...

억울합니다. 저는 원래 칼질을 꽤 잘한다고요.

재판장님, 변명타임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아니~ 양파가 산지 좀 되면 살짝 물러지거든요? 그런 양파를 가지고 채 썰기를 하다가 그만 양파의 가장 겉 한 곂이 미끄러진 거예요. 그래서 손이 칼 쪽으로 스윽 가면서, 아차, 제가 당신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건 아니겠지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실 그 전날도 설거지하다가 칼을 잘못 집어서 살짝 베였거든요. 우헤헤. 이틀 연속으로 칼에 베이니까 칼질이 무서워지더라고요. 이제 다 통으로 먹으려고요. 통감자, 통라면, 통밥, 통통이.

그렇다고 이미 계란말이까지 만든 상황에서 요리를 중단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급히 도시락 제조를 요청했습니다. sos! 미션을 받은 친구는 이틀 동안 저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었습니다.

피가 살짝 섞인 가지볶음과 계란말이, 밥
땡초김밥과 딸기

친구는 도시락을 건네줄 때마다 꼭 한 마디씩 덧붙였습니다. “가지볶음이 좀 짤 수 있거든? 밥이랑 계란말이랑 꼭 같이 먹어” 라든가, “볶음밥이 안 질어서 그런가 김밥이 썰 때마다 터져서 모양이 안 예뻐” 라든가요. 짭짤한 가지볶음을 먹을 때 웃음이 쿡, 못난이김밥을 보자마자 웃음이 쿡쿡.


친구가 어젯밤 도시락을 만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반찬을 만드는 내내 제 입맛에 맞을지 아닐지 고심했겠지요. 어떻게 플레이팅을 해야 조금이라도 더 맛있어 보일지 이리저리 시도해 봤겠지요. 혹시나 양이 부족할까 꾹꾹 담아둔 밥은 전자레인지에 돌리지 않아도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습니다.


남이 싸준 도시락이 훠어얼씬 맛있더랍니다. 귀엽고 뭉클한 맛, 매일 먹고 싶은 맛. 내일부터는 다시 제가 도시락을 싸야 하는데, 이미 온기 가득한 도시락에 맛이 들려버려서 어쩜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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