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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Dec 23. 2022

소중한 것은 사소한 것의 탈을 쓰고.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여섯 번째 편지



안녕, 아들?

오늘은 사소한 인사로 시작해보고 싶었어. 우리 아들 요즘은 안녕하니?

엄마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이 별로 안녕하지 못함이 유감이다. 요 며칠 엄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말도 못 할 고생을 하고 있어.

발병 첫날, 응급실 신세를 지고도 나아지지 않는 증상에다 며칠 뒤의 병원 진료에서도 '원인 없음'이란 힘 빠지는 진단을 들었지. 약물치료를 하고 있는 중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심히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제는 용기 내어 며칠 만에 산에 갔다 왔는데 뭐, 산행 때문은 아닌 거 같았는데 오후에 앓아눕는 바람에 너의 아빠가 산행을 극구 반대하여 오늘은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랜만에 비도 오고 한동안 보지 못한 영화도 보고 나름 좋은 시간을 보냈어. 물론 어질어질한 상태가 아니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손도 덜덜 떨리는 게 꼭 중병 환자 같기도 하고. 지병을 앓는 사람의 고통을 약간 헤아려보기도 하고.


어지럼증 첫날, 저녁에는 구토증상까지 더해져 정말 죽다 살아났다. 미친 듯 흔들리는 배를 타고 내린 양 뒤집어지는 속을 참아내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어.

아, 정말 평상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일어나지도 못해 누워서 고통에 절절매며 저절로 이런 간절한 생각을 곱씹고 곱씹었다.

엄마는 요 근래 벌써 세 번째 이런 고통을 겪었어. 올 초, 그때도 지금처럼 알 수 없는 어지럼증과 두통, 메스꺼움으로 병원신세를 졌고 그다음은 두 번째 맞은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으로 MRI 검사까지 했었지.

동네 병원의 의사가 "아무래도 대학병원 가서 MRI 찍어보셔야겠습니다." 하더구나. 덤덤히 나와 정산하는 너의 아빠 뒤에 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너의 아빠가 모르게 하려고 얼른 눈물을 훔치려는 데도 잘 안 됐다. 마침 밖으로 나온 의사가 울고 있는 나를 보더니 당황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는데 이미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어. 이미 엄마의 머릿속엔 어린 너의 걱정으로 가득 찼거든.


결론적으로, 요란을 떨었던 두 번째의 나의 고통도 '원인 없음'으로 끝났다. 전에 한 번 언급했듯 엄마는 타고나길 예민한 감각을 가졌고 남들보다 고통을 좀 더 느끼고 심지어는 고통이 아닌 것도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는 신경과 의사의 말을 듣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 엄마가 가진 만성적인 두통과 어깨, 목 등의 통증에 대한 원인 비슷한 것으로 수긍이 됐어. (비록 해결책은 없지만.) 약으로 잘 다스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받아들이니 오히려 편안해져 가끔 두통이 일 때, 약으로 다스리며 잘 지내왔다. 그런데 이렇게 불현듯 다른 합병증까지 겹치니 심신이 많이 힘드네. 이 어지럼증 안 낫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고. 건강할 때 정말 '아무렇지 않은' 나의 몸 상태가 간절하고 그립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괜찮을까 내일은 약이 들을까 안타깝게 기다린다.




며칠 전, 너의 아빠가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명의'란 프로그램을 보길래 같이 보게 됐어. 공교롭게도 건강을 잃은 후 건강할 때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시청자들에게 건강할 때 건강을 돌보라는 뼈저린 당부를 하는 한 간암환자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어.

그 사람의 몰골은 처참했다. "인간이란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잇지 못한 그의 마지막 말은, '건강할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잃고 나니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내 사소한 일상이...'라고 이어지는 듯했어. 어질어질하는 엄마는 어찌나 그 말에 공감되던지.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너의 아빠의 한숨에서도 내심 긴장이 느껴졌다니까.


어디 건강뿐이겠니. 안타깝지만 너는 앞으로 사소한 일상에 살짝 금이 가도 일상성을 잃어 괴로움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크게 당황할 거야. 아프고.

건강을 잃고 내 가족이 건강을 잃고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정들었던 무언가를 잃고. 그 상실감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평범하고 사소했던 내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될 거야. 너무도 힘든 오늘을 보내면 아무렇지도 않게 집안을 돌아다니던 어제의 내가, 그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로의 회귀가 절실하게 느껴질 거야. 그리고 사실은 사소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과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나의 안녕에 안녕할 수 있는 행운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알게 되겠지. 그리고 지키려 애쓰게 된다. 그저 주어지는 사소함이 아닌 것에 내 건강에, 내 가족에, 내 위치에, 내가 속한 이 세상에.




'그저 있음'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으면 너의 욕심과 바람은 쓸모 없어진다. 내가 가진 지금의 상태와 환경이 이미 너무나도 소중한데 더 바랄게 뭐가 있겠니.

그래서 그저 있기만 해도 괜찮은 사람에게 그 이상의 요구와 잔소리는 불필요한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다. 언젠가 너에게 아주 소중한 인간관계에 있어 상대에게, 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뱉게 될 많은 요구와 바람이 상대에겐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어. 그가 네 옆에 꼭 있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라. 여기서는 너무 애쓸 필요 없다는 것이지.

그러나 너의 건강과 너의 생활과 경제력과 네가 속한 세상의 안녕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애쓰며 살아야 한다. 잃었을 때의 큰 상실을 맛보고 일상성의 위대함을 깨달으며 다시 잃지 않기 위해 진심으로 행동하며 탄탄한 어른이 되어가야겠지. 상실이 주는 교훈도 분명히 있다. 어디에서건 우리는 배울 점이 있어. 너는 어느 정도 예민하게 감각하여 주변의 일로부터 잘 배울 수 있는 진보한 사람이 되어야 좋겠다. 물론 엄마처럼 너무 예민한 건 좀 그렇지?




이런, 부산의 한낮에 눈바람이 세차게 부는구나. 아침엔 좀 추워도 해가 났는데 어느새 좀 어두워지는가 싶게 이리 눈보라라니!(그래봤자 진눈깨비 날리는 거지만 이것도 여기선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다!)

어, 잠깐 하다 그치는구나. 다시 해가 쨍쨍한 게 널어놓은 너의 이불이 제대로 볕을 쬐네. 2시만 돼도 뒷산으로 해가 넘어가 어둑해지는 요즘에 잠깐의 해는 약간의 활력을 돋우어준다. 따뜻하고 고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오락가락했던 오늘의 날씨같이, 이제까지의 나는 좀 춥더라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또 잠깐의 눈바람 속에 있는 거다. 곧 이리 따뜻해질 건데 찬찬히 기다려보자, 하는.

어떠니, 정말로 자연과 우리는 닮지 않았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그 변동 속에서 그래도 일상성을 용케도 유지하는.


엄마는 곧 괜찮아질 거야. 멀쩡하게 힘차게 산속을 걸으며 너에게 쓸 편지를 궁리할 때가 머지않았다. 엄마는 너의 무사함에 정말로, 정말로 감사하면서 만일 네가 안 좋을 때도 엄마는 굳세게 잘 평상심을 유지해 너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한번 다잡아 본다. 그리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너무나 감사한 너를 위해 엄마는 욕심을 내려놓고 너를 닮은 웃음을 한번 웃어본다.

반달모양 눈웃음을 웃는 이도. 포동포동한 너를 안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이렇게 품 안에 맘껏 안을 수 있을 때 원 없이 너를 안아주고 싶다. 엄마는 이 사소함의 소중함을 지금 알아서  다행이다. 이도야, 이따 보자, 안녕!




2022. DEC. 엄마의 여섯 번째 편지.



자는 이도. 엄마가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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