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상사가 꽂은 빨대에 피를 쪽쪽 빨려 거죽 떼기만 남아도 퇴근길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군고구마를 가슴에 품고 들어가는 아빠가 있다.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는 아빠, 언제나 내편을 들어주고 무슨 일이 생겨도 항상 그 자리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빠는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우리 집에만 없을 뿐 다른 친구들의 집에는 그런 아빠가 존재했다.
엄마와 대화를 하다 보면 돈이나 아빠라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삼천포로 빠지는가 하면 엄마의 무언가가 건드려져서 결국 도착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그 인간은 돈도 더럽게 안 벌어줬어. 지금 같아서는 눕혀놓고 두들겨 패서 밟아 죽이고 싶다니까!"
한 번만 더 들으면 백만 번째다.
휴.. 엄마가 그때 순진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천애 고아가 될뻔하지 않았겠는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때는 1983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무에는 감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릴 때즈음에 나는 온몸에 가난을 주렁주렁 달고 인천의 어느 동네에서 태어났다. 얼마나 가난했는지는 활화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여인숙방 하나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쌍둥이를 임신한 작은 고모, 아빠, 오빠, 그리고 나를 임신한 엄마 이렇게 7명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맙소사.. 이게 무슨 말인가..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작은 방에서 시댁식구들이 버글버글한 소굴에서 임신한 몸으로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가난할 수가 있을까? 꾸준히 일을 하지 않았거나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많았을까..?
답은 나와있다. 7명의 식구들이 한방 안에서 숙식을 함께 하는데 돈을 버는 사람은 두 명이었고, 그마저도 삼촌을 제외한 아빠는 경마에 빠진 도박중독자였기 때문이다. 벌어들인 돈이 없으니 쓸 돈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건지. 내가 세네 살이 되던 해에 인천에서 작은 공장을 했다고 한다. 그땐 아빠도 엄마도 꽤나 열심히 사셨고 돈도 좀 벌으셨다고 했다.
그렇게 계속 열심히 사셨으면 좋으련만.. 지 버릇은 개 못준다더니 다시 경마에 손을 댄 아빠덕에 공장은 토네이도에 휩쓸린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우리는 서울의 어느 무허가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 다른 건 다 내려놓고,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면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함께 살 수 있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살면 그게 가족 아닌가.
뭐든 시작은 잘하는 사람이었다. 인천에서도 그랬겠지만 서울에서도 열심히 사는 듯했다. 단칸 셋방이면 어떤가. 우리네 식구가 오붓하게 지낼 보금자리도 생겼고 아빠와 엄마가 싸우지 않는 것 같아서 좋았다. 엄마는 동네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실을 짜는 일을 했고 손이 워낙 빨라서 남들보다 많은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그래도여전히 가난했다. 가난해도 가족이 함께라 힘들지 않았다. 엄마는 그때 그렇게만 열심히 계속 살았으면 지금은 훨씬 부자가 되었을 거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학교에서도 가난은 연속이었다.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해서 혼나는 것은 당연하고 간식 시간이 되면 우유를 마시는 아이들과 가방에서 꺼낸 달콤한 향이 솔솔 풍기는 빨간 딸기를 맛있게 먹는 아이들 사이로 국민체조만 열심히 따라 하던 내가 있었다. 가난이 몸에 베여서인지 전혀 부럽지도 않았다. 감히 부러워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 아이들은 저 위의 세상에 사는 아이들이었고 나는 이 아랫세상에 사는 난쟁이똥자루일 뿐이었다.
이런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듯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겠다는 굳은 다짐이라도 하듯, 그동안 올리지 못한 결혼식 대신이지만 결혼사진도 찍고 가까운 곳으로 신혼여행도 다녀오셨다. 나는 그렇게 우리 집도 평범해지는 줄 알았다.
누군가 말했다. 촛불은 꺼지기 전에 더 활활 타오르는 법이라고.
시련은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 어느 무더웠던 여름날. 엄마와 나는 마당 한쪽에 종이박스를 펼쳐놓고 그 위에 앉아있었다. 부채질을 하며 엄마품에서 놀던 나는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그 앞에서 쫑알쫑알 이야기를 해도 엄마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하염없이 대문을 바라보며 아빠가 저 대문을 열고 들어와 활짝 웃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멍하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기다렸지만.. 끝내 그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으셨다. 너무 큰 상처가 눈물까지 얼어붙게 만든 걸까?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었을까?
아빠는 그렇게 집을 나갔다. 전화 한 통도, 아무런 말도 없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듯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