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에 미치면 눈이 뒤집힌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집을 나가면서 엄마의 월급석 달 치와 그 당시에는 집전화기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한국통신에 보증금을 내야 했는데 그 보증금 20만 원을 빼버리고, 오빠와 내가 모은 돼지저금통까지 탈탈 털어갔다고 한다. 이쯤 되면 눈이 뒤집힌 게 맞다고 하겠다.
돈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처자식이야 굶어 죽든지 말든지 자기 욕구만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인간에게도 할 말은 있었겠지. 큰돈으로 불려서 귀향하겠다는 어리석은 말 같은 거?
우리는 그렇게 무허가 동네에서 버려졌다. 사실 무허가동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느낌이 들만큼 집은 허름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냥 내 마음대로 무허가 동네라 해야겠다.
이 동네가 얼마나 무서운 동네냐면.. 어느 여름날 내가 보았던 모습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커다란 판자 위에 돼지 한 마리를 올려두고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털을 벗기던 모습.. 어떤 날은 개 한 마리를 나무에 매달아 두고는 토치불로 털을 태우던 모습.. 살아있는 하얀 거위의 목을 칼로 그어 그 피를 소주잔에 받아 마시던 모습.. 아직도 여기까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다.
이런 동네에 남겨진 엄마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심지어 앞으로 3개월간의 수입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엄마의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 살이었다. 12살과 10살 된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살길이 막막했을 엄마는 그날밤 커다란 유리병에 담겨있는 과실주를 꺼냈다. 평소에는 술도 한잔 못 마시지만 그날은 과실주병의 술을 국자로 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술에 취해 힘없이 축 늘어진 채로 나를 꼭 안으시고는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한숨과 눈물이 뒤엉켜 같은 말만 반복하셨다.
"별아... 엄마 없으면 누구랑 살래..?"
나는 너무 무서웠다. 엄마가 이대로 거품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엄마를 더 꽉 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소리를 내고 울면 엄마가 더 슬퍼서 떠날 것만 같았다.
"별아... 엄마 없으면.. 누구랑 살래...? 응??"
"어.. 엄.. 마.. 흐흑.."
"별아.. 우리별아.. 엄마 없으면.. 누구랑.. 살까..."
엄마의 뜨거운 숨결이 내 볼에 닿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엄마가 없다는 것. 그건 나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일 같았다. '엄마가 없으면 나도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흐으흑.. 흐으윽.."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세상이 사라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엄마와 나만 남겨진 것 같았다.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자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남자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세상을 살게 해주는 버팀목이 사라져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이다.
나의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술에 취한 사람도 처음 보았다.아빠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우주 같은 엄마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을까?
나는 이날 이후로 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 어둑어둑해지는 그 풍경이 펼쳐지면 어김없이 두려움이 새살 돋듯이 올라왔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고 금방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러다 캄캄한 밤이 되면 이내 잦아들곤 했다.그땐 너무 어려서 몰랐다. 20년 넘도록 나를 조여왔던 공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
트라우마다. 지금껏 나를 괴롭힌 알 수 없는 공포의 정체를 이제 알았다.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별거 아니었다. 내 삶이 그러했고 단 한 번도 부유한 적이 없어서 그 느낌조차 몰랐다. 나에게 엄마란 존재는 달랐다. 나의 세상이고 우주였다. 그런 엄마가 사라진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나마저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가난보다 무서운 것이 엄마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정체를 알고 나니 그 공포가 점차 줄었다. 나를 위로하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희미한 부스러기까지 사라졌다.
열 살의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작은 키에 하얀 피부, 짙은 눈썹과 그 아래 빨간 입술.. 언제나 기가 죽어있던 너.. 엄마 앞에서만 쫑알쫑알 재잘거리던 너..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어서 눈치만 보던 너.. 버림받을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