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6시간 동안 강의를 마쳤다. '룰루랄라~' 기분이 좋았다. 준비한 강의를 무사히 끝내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그런 날은 이상하게 집안일까지 척척 하고 싶어진다. 미뤄놨던 재활용 쓰레기도 버리고 빨래도 돌리고 정리정돈도 한다. 목은 아프고 몸은 지쳤지만 성취감이 엔진처럼 돌아가 귀찮던 일도 힘들이지 않고 해낸다. 그런데 그날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남편: "강의 잘 끝났어? 바로 가게 좀 가봐. 여탕 화장실 변기가 세 개나 막혔대. "
'세. 개. '
갑자기 머리끝까지 짜증이 솟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산뜻했던 기분이 누군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나는 집안일을 하려고 했던 거지. 변기 세 개와 씨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똑같은 일이지만 마음가짐이 다르다. 더군다나 한 개도 아니고 세 개의 변기라니.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못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 청소 이모님은 변기가 3개 막힐 동안 어떻게 하신 거야? 내가 올 때까지 손 놓고 계신 거 아니야? 어떻게 3개나 막히게 할 수가 있는 거야? 내가 변기 뚫는 담당자도 아니고!'
강의했던 옷을 입고 변기 뚫을 수 없으니, 집에 들러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 목걸이, 시계도 다 뺐다. 머리는 집게핀으로 집어 올렸다. 화장만은 귀찮아서 그대로 두었다. 혹시 뚫어뻥이 오래되어서 안되는가 싶어 철물점에 들러 '뚫어뻥 풀세트'를 사들고 현장에 투입. 장비탓 하면 안 되지만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것밖에 믿을 게 없었다. 여탕 변기 네 개 중 세 개가 막혀 있으니 상황이 긴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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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동안 뚫어뻥, 공기압, 탄산가스, 인터넷 검색까지 총 동원했다. 피하지방으로만 구성된 팔뚝살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마스크 속에서 이를 악물고 거의 올림픽 역도선수급으로 힘을 쏟아부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변기 뚫기의 국가대표 같았다. 젖 먹던 힘을 다했으나 전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분노가 치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청소 이모님 심정이 이해됐다. 이건 웬만해선 답이 안 나왔다.
'이래서 안 된다고 청소 이모님이 나를 찾은 거구나. '
아까까지만 해도 화가 났다. 그냥 일반적인 화가 아니라 혈압이 고막을 뚫고 나갈 것 같은 분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감정이 변했다. 분노에서 공감. 그리고 갑자기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이게 계속 같은 방식으로 될 일이 아니란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집에 돌아왔다. 애들 밥은 먹여야 하니까. 그런데 진짜 아무 힘도 없었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손목이 저릿했고 팔뚝은 내 것이 아니었다. 주방 불 켜는 것도 싫어서 그냥 소파에 털썩 누워 배달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남편에게 '변기 대첩' 상황의 심각성을 아주 또렷하게 보고했다. 내가 어떤 도구를 썼고 어떤 자세로 눌렸고 어떤 정신상태로 싸웠는지 상세하게. 남편은 조용히 듣더니 새로운 도구 얘기를 꺼냈다.
그 길로 바로 나의 성지 '에이스 하드웨어'로 향했다. 이번 도구는 뭔가 달랐다. 고무 펌프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돌리면 스프링 줄이 나와 걸린 걸 콕 찝고 구석구석 막힌 것을 뚫어주는 그야말로 기계 문명의 결정체 같았다. 도구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느낌은 있었다. 이건 된다. 이건 진짜 끝판왕이다.
이 스프링 줄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어깨는 뻐근하고 팔은 후들거렸고 손은 벌써 떨렸지만 여탕에는 나 말고 변기와 맞설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악을 쓰고 변기와 씨름했다. 결과는?
1시간 만에 좌절. 딱 그 생각이 들었다.
'아. 나로선 도저히 안 되겠겠구나.'
결국 결단을 내렸다. 밤 12시에 남자직원 들어온다고 손님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놓았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어 남편과 다시 여탕으로 들어갔다. 남편이랑 함께 들어가니 이상하게 든든했다. 단순히 체격이 커서가 아니었다. '뚫는 사람의 주체'가 나에서 남편으로 바뀌니 세상이 살 만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건 내 일이니까' 하고 혼자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는 보조라는 역할로 내려오니 숨이 쉬어졌다. 그제야 남편이 평소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하는지 알 것 같다. 찜질방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항상 해결자는 남편이었다. 나는 옆에서 궁시렁대는 역할이었는데 오늘은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보니 느껴졌다.
'아... 사람이 해결을 떠맡으면, 이 고통이구나.'
마음속은 한없이 애잔한데 현실은 변기를 격렬하게 뚫고 있는 상황. 묘하게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어쨌든 남편과 합심해서 3개의 변기 모두 뚫긴 했다. 그런데 찝찝했다. 시원하게 쭈우욱 내려가는 느낌은 없었다. 누가 휴지 한 장만 과하게 넣으면 바로 막힐 것 같은 예감. 예전에 내가 디자인해서 예쁘게 만들어 붙여둔 '화장실 에티켓' 안내문은 쓸모가 없었다. 디자인이고 뭐고 필요 없다. 급하게 종이에 써 붙였다.
'휴지를 변기에 절대 넣지 마세요.'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다음 날 또 전화가 왔다. 다시 다 막혔다고.
결국 전문가를 불렀다. 밤에 또 여탕으로 출동. 전문가가 와서 상황을 보더니 "이건 보통 막힘이 아니에요." 하셨다. 웬만한 도구로는 안 되고, 변기 뜯어보고 그것도 안 되면 하수도 배관까지 뜯는 대공사가 이어질 거라고 했다. 잠깐 멍했다. 결국 변기를 뜯었다.
변기를 뜯어보니, 정말 기가 막혔다. 구멍을 꽉 막고 있었던 건 바로 '옥수수'였다. 옥수수. 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옥수수 맞아요. 3개 중 2개의 변기에서 그 단단하고 맹렬한 옥수수 심지가 나왔다. 누가, 왜, 어떻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옥수수를 변기에 넣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 심지가 내려갈 리가 없잖아요. 그건 일반쓰레기잖아요.
이 모든 걸 모르고 나는 팔이 떨어져라 뚫어뻥을 누르고 있었다. 심하게 허무했다. 더 세게 눌렀다면 옥수수가 하수도 깊숙이 들어가 더 큰 공사가 될 뻔했다. 그놈의 옥수수를 빼고 나니 변기가 갑자기 성격이 바뀌었다. 그렇게 시원하게 잘 내려갈 수가 없다. 정말.
여기서 끝인 줄 알았는데 나는 다음 날 또 여탕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전문가가 붙여놓은 변기 연결 부위가 떨어져서 남편과 함께 백색 실리콘 범벅 작업을 다시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몸살로 며칠을 누웠다. 아니, 그냥 '살'이 아팠다. 육체가 진심으로 절망했다. 장비 사고 전문가 부르고 또 작업하느라 온몸이 망가졌고 정신도 축났다. 그리고 화도 났다. 옥수수 넣은 사람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솟구쳤지만 너무 지치니 화낼 힘조차 없다. 그저 바닥에 누워 '옥수수...'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마음속이 시끄럽고 몸은 지쳐서 축 늘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연해졌다.
비바람은 언젠가 지나간다고 한다. 이번엔 변기라는 이름의 태풍이 한 번 휩쓸고 간 거다. 덕분에 내 '고생 역치'도 한 단계 레벨 업 되었다. 열심히 변기를 뚫려고 노력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 '옥수수'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도 결국 방향이 틀리면 그 모든 노력은 그저 옥수수를 더 깊이 박아 넣는 일일 수 있다. 그래도 '헛수고'도 얻는 게 있다. 새삼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감사하다고 생각되었다. 단순 '해프닝이었고 힘들었던 경험이었다.'에서 끝이 아니라, 이렇게 적으며 마음정리. 인생의 교훈을 얻은 거 같아서다.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한 가지 더 생겼다.
오늘따라 잘 내려가는 변기. 그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