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잊고 살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잊게 되는 건지. 간호사를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간호지식 같은 건 잊고 살았다. 거의 모두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간호학원 강사를 시작하며 간호지식을 공부하니 뇌 어딘가에서 파업중이던 지식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게 생각보다 찜질방 박반장 역할에도 꽤 쓸모가 있다는 거다. 간호학원 강사와 찜질방 박반장의 교집합. 이 조합은 나도 예상 못 한 협업인데 신기하게도 괜찮은 콜라보를 이룬다. 약간 비빔면과 아이스크림 같은 신세계랄까? 처음에는 이렇게도 활용이 되네 싶은 것들이 점점 늘어나 자꾸 두 분야를 접목시키고 싶어진다.
찜질방에서 일하다 보면 무거운 거 들다가 허리 나가는 건 기본 옵션이다. 그래서 나는 일할 때 늘 신체 역학을 머릿속에 켜놓고 산다. 말하자면 몸을 덜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글 쓰다 잠깐 전하는 간호 상식
신체 역학이란 건, 쉽게 말해서 물건을 들고 몸을 굽히고 쪼그렸다가 일어나는 순간 마다 우리 몸이 고장나지 않도록 하는 거다. 근육과 신경이 짜릿짜릿 팀워크를 발휘하는 원리다. 기저면을 넓히고 무게중심은 낮추고 물건은 내 몸 가까이에. 허리는 가만히하고 무릎은 접는다. 요컨대, 허리 말고 엉덩이를 쓰라는 뜻이다.
찜질방에서는 이게 거의 생존 지식이다. 빨래방에서 빨래를 꺼낼 때도 나는 오른발 왼발을 넓게 벌리고 무게중심 낮춰 혼자 자세를 잡고 일한다. 이걸 알고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는 퇴근 후 파스 붙일 부위의 개수 차이로 나타난다. 가족이나 직원분들에게도이 원리를 알려드려 사고를 예방하고자 노력한다.
하루는 옷장 열쇠를 고치고 있는데 직원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탕에 앉아 있던 손님이 어지러워 누워있다는 거다. 순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간호모드 ON.
글 쓰다 잠깐 전하는 간호 상식
기립성 저혈압이란, 이름만 거창하지 쉽게 말하면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나면 핑 도는 그거다. 온탕에 오래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면 혈압이 훅 떨어지고 뇌로 가는 피도 덜 가고 그러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현상이 생긴다. 예방은 아주 간단하다. 천천히 일어나기. 이게 전부다. 근데 다들 하지 않는다.
현장에 가보니, 손님은 완전히 실신은 아니었지만 거의 실신 직전. 그 와중에도 나는 '의식 확인이 먼저'라는 간호 본능을 발휘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찜...질방....?"
의식 OK. 외상 없음. 바로 트렌델렌부르크 자세를 적용했다. 이건 일명 쇼크자세인데 다리를 심장보다 높게 올려서 뇌로 피를 조금 더 보내주는 응급처치 자세다. 나는 수건을 겹겹이 쌓아 다리 밑에 지지했다. 손님을 수건과 옷으로 덮어 체온 손실을 막았다. 누가 보면 피서 나온 줄 알았을 그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체위 종류' 강의 내용을 되새겼다. 이게 바로 실전이다 하면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때 마침 '환자의 체위의 종류'에 대해서 강의를 하던 중이라 당황하지 않고 바로 할 수 있었다. 손님은 잠깐 실신했던 거였고 다행히 컨디션이 금방 회복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아찔한 사고였지만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날 밤 손님의 딸에게 감사 전화가 왔다.
"엄마 혼자 가셨는데 빠르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에 갑자기 울컥했다. 우리 엄마도, 혼자 동네 목욕탕 다니실 텐데. 시집 보내 놓고 딸은 멀리 살아 못 오고. (이번 주말엔 엄마 우리 찜질방 데려와야겠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같은 경험도 경험치와 해석력, 내 안의 그릇 크기에 따라 다르게 남는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간호학원과 찜질방을 왔다갔다 하며 내 그릇을 야금야금 키워가는 중이다. 진정한 N잡러란 결국
Mix를 얼마나 맛깔나게 하느냐의 문제라는 걸 오늘도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간호지식을 활용한 찜질방 박반장으로 살아갈 예정이다. 더 야무지고 더 든든하고 가끔은 어이없을 정도로 전문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