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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잡는 그놈의 '하수구'

by 다몽 박작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친구랑 사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외모로 좋고 싫고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 본 순간, 이 친구는 별로였다. 진짜 친해지기 싫은 비주얼. 얼굴 보기가 싫을 정도였다. 좋게 보려고 애써도 그냥 '싫은 얼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친구'였다.


하지만 자꾸 마주치다 보니


"아, 나 꼭 이 친구랑 친구가 되어야 하나?"라는 생각과

"아, 이건 완전 내 삐뚤어진 고집이지."라는 자괴감 사이에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이 그렇게 미워하던 물건한테도 정이 들 수 있다니. 처음엔 얼굴도 보기 싫었던 그 친구에게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정'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거부감은 무덤처럼 깊었는데 반복되는 만남과 공들인 시간 속에서 어느새 내 일상에 아주 자연스럽게 묻어 들어버린 존재.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막역한 사이가 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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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바로 '뚫어뻥'이다.


여탕 박반장이라는 직업은 여러 도구와 친해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고장 난 전구, 빠진 나사, 망가진 수도꼭지까지.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수구 뚫기라는 일은 나의 일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뚫어뻥이랑 보내온 시간만큼 우리 사이가 쌓인 일이 있을까 싶다.






며칠 전 오랜만에 친한 언니와 브런치 데이트를 잡았다. 패션센스는 없지만 그날은 청바지를 입었다. 고무줄이 쫙쫙 늘어나는 운동복이 편해도 오늘은 브런치니까. 평소 브런치를 먹을 일이 없기에 아침부터 신이 났다. 아니 며칠 전부터 신이 나서 아침부터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왔다. 언니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자 약속 장소에 가기 전 찜질방부터 갔다. 여탕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한참 즐겁게 대화하는데 찜질방에 무슨 일이 있다고 전화가 오면 바로 가봐야 하니 미리 둘러보려고 했다.


여탕 안을 둘러보는데 심상치 않은 걸 감지한다. 바로 하수구가 막힌 걸 발견한다. '이럴 땐 내 친구 뚫어뻥을 쓸 때'라는 느낌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청바지를 입고 막힌 하수구 앞에 서서 양손으로 힘을 주며 뚫어뻥을 꾹꾹 누르는 나. "제발..." 하며 몇 번 푸시푸시. 그런데 이게 쉽게 뚫릴 리가 없지. 임시방편으로 물흡입 청소기를 이용해 고여 있는 물만 제거했다. 결국 청바지에 물 튀고 냄새 밴 채 브런치 장소로 갔다. 언니에게 하수구 하소연을 늘어놓는데 이 모든 게 이상하게 웃기다.

(하수구 뚫다 오니 배고파서 브런치는 더 꿀맛이다^^)


여탕의 박반장이 되어 보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어렵다. 마음을 먹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 사이엔 언제나 몇 겹의 벽이 있다. 특히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점점 퍼져나가고 있을 땐 나도 같이 휩쓸리는 기분이 든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다시 배운다. 그날도 그랬다. 하수구가 심상치 않았고 뚫어뻥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으며 고인 물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보통 이런 상황이면 여탕 손님들께 미리 양해를 조심스레 구하고 밤늦은 시간에 남편과 함께 들어가 해결한다. 이른바 심야 작업반이 된다. 하필 그날은 남편이 멀리 있었다.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거리에. 그래서 남편과 통화 후 하수구 업체를 부르기로 했다.






하수구 업체와의 밤 약속이 잡히자 일단 마음 한편이 편안해졌다.


"그래. 적어도 오늘 밤 내가 하수구와 단둘이 싸우게 되진 않겠구나." 하는 마음.


그게 전부였는데도 어쩐지 체감상 스트레스가 30%는 줄었다. 믿을 구석이 생기면 마음이 그렇게도 다정해지는 건가 싶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들 저녁밥을 챙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뚝섬 드런쇼'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니. 드론쇼라고요? 뚝섬에서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몇 년 전 부산에서 우연히 본 영상 속 드론쇼가 얼마나 황홀했는지. 심지어 그걸 보고 '나도 저걸 꼭 실물로 보겠다.'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그 꿈의 장소가 내 위치에서 35분 거리라니.


이따 밤에 하수구 작업도 해야 하고. 물바다가 될 주차장도. 그 물을 다 내가 치워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날 밤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정해진 밤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어쩐지 조금씩, 아니 뚝뚝 뚝뚝 기울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그러다 급기야 확 쏠렸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보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핑계 삼아 보러 가기로 했다.


"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사실은 '내가 꼭 보고 싶어서'가 맞지만 이럴 땐 아이들이라는 만능 명분이 나를 도와준다.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든든했다. 그래서 결국 차를 타고 뚝섬으로 향했다. 마치 뚝섬 가는 게 무슨 인생 숙제라도 되는 것처럼 괜히 일찍 도착해서는 편의점에 들러 먹을 것까지 사들고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찜질방에서 전화가 왔다. 물 수위가 낮아졌다고 물을 어떻게 트는 거냐고. 나는 편의점 앞 잔디밭에 앉아 영상통화를 켜고 빨래방 아저씨께 온갖 사투를 벌이며 원격 수도 강의를 했다.


"그거요. 왼쪽 레버 말고 오른쪽. 아니 그 밑에요. 그렇죠. 이제 시계방향으로 돌리시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지 않은 드론쇼 대기시간이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린 끝에 드디어 드론들이 떠올랐다.



천 개의 드론이 칠흑 같은 한강 밤하늘 위에서 형형색색의 도형과 문장을 만들어내며 유려하게 날았다. 'SEOUL MY SOUL'이라는 문구가 공중에 떴을 때 나는 잠시 모든 걸 잊었다. 하수구도. 물바다도. 내 청바지에 튄 미확인 액체 자국도. 모두 다. 아이들도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진심으로 뿌듯했다. 정말이지 잘 데리고 왔다. 나도 보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드론쇼를 본 뒤, 아이들을 씻기고 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을 씻기고 재웠다기보다 나도 반쯤 졸고 있었다. 이제 다시 찜질방에 가야 할 시간. 발목 잡는 그놈의 하수구 때문에 하루 종일 난리다. 하수구 뚫다 브런치 먹고 드론쇼 보고 다시 하수구를 뚫으러 간다. 참 길고 긴 하루다. 하루치 일정이라기보다 넷플릭스 시즌 1 전체 요약 같은 하루다.


밤 12시. 약속된 시간에 하수구 업체가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분들이 부부라는 걸. 남자분이 주로 작업을 하고 여자분이 조심스럽게 서포트하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우리 부부와 비슷한 구도 같다. 물론, 지금은 나 혼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많이 외롭고 남편이 없어 속상했다.

작업은 전문적이었다. 내시경을 넣어 하수구 안을 확인하고 높은 수압의 기계를 이용해 물을 쏘며 뚫는다. 하수구 배관 안에 막힌 부분을 직접 망치로 치고 다시 확인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옆에서


"조금만 더 시원하게 부탁드릴게요."라고.



그 사이 지하 주차장은 이름처럼 '주차'보다는 '연못'에 가까운 풍경이 되었다. 차가 많지 않은 심야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 물을 다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껏 끌어오던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발끝부터 밀려왔다. 뚫는데 지쳐 있는 분들에게 미안해서 나도 열심히 돕는다. 이쯤 되면 물바다를 치우는 데도 어떤 기술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요령 따위는 없다. 정말 없다. 그냥 물치우는 도구로 왔다 갔다 하는 거다. 무한 반복으로. 물 흡입 청소기를 동원해 보지만 그날의 물은 그 모든 장비를 비웃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손으로 몸으로 그냥 무식하게 몇 시간을 들여 치웠다. 깨끗해졌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오늘이 끝났다. 정확히는 새벽 3시. 그러니까 이건 더 이상 오늘이 아니라 새로운 내일"이 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뼛속까지 피곤한 하루다. 온몸이 진창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거 나 혼자 해냈네?"


정확히는 남편 없이도 내가 진짜 혼자였는데 끝까지 해냈다. 그 어렵고 지저분하고 귀찮고 체력까지 쏙 뺄 정도로 힘든 일을. 이건 뿌듯함이라는 단어로는 좀 모자라다.


'내가 생각한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 '


이런 생각까지 슬그머니 올라왔으니까. 이따금 주변 분들 중에 내 씩씩함을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이 있다. 특히 한 분은 "야무지고 씩씩한 여자 너무 좋아요."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보너스 같은 감정이다. 찜질방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에피소드들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근육 같은 게 생기기 마련이다.


씩씩함이란 그렇게 생기는가 보다.

그렇게 오늘도 씩씩함의 수치가 +50만큼 올라갔다. 게임이었다면 레벨업 사운드가 뿅 하고 울렸을 텐데 현실이라서 조용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 이 고요함 속에 진짜 내 마음 안에서 "잘했어."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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