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 때문에 사귀게 된 오래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처음부터 친해진 건 아니었다. 사실 처음에 그 친구를 굉장히 싫어했다. 외모로 평가하거나 싫어하면 안 되지만 그 친구는 외적으로 참 별로였다. 친해지기 싫은 비주얼이었고 자주 보기 싫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꼭 친해져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싫어하자니 그건 또 괴로웠다. 자주 보지 않아도 되면 모르겠지만 종종 얼굴을 마주쳐야 되기에. 그때마다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다. 그 친구와 친구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하다. 친구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쉽지 않았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있다. 반대로 '그 친구는 나를 좋게 볼까?'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친구는 나에게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오랜 시간 함께하니 정이 들었다. 처음엔 보기도 싫던 얼굴이었는데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니 점점 친근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막역한 사이가 되고 나니 그 친구를 사랑스럽게 볼 수는 없어도 친근하게 볼 수는 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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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바로 '뚫어뻥'이다.
뚫어뻥과 친구가 되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뚫어뻥과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거의 한 몸이 되다시피 하니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찜질방 박반장은 참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수도꼭지 고치기 옷장과 신발장 고치기 전구 갈기 등등. 그런데 제일 많이 하고 자주 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 '하수구 뚫기'다. 하수구 뚫기가 박반장의 삶과 밀접해 있다 보니 함께 한 추억도 쌓이고 있다.
오랜만에 약속을 잡았다. 옆동네로 이사를 간 언니였다. 이사 가기 전 한 동네에 살면서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함께 키운 편하고 좋은 언니였다. 자주 보던 사이였는데 이사를 가니 얼굴 보기 쉽지 않았다. 차로 10분 밖에 안 되는 거리였는데 워낙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약속 잡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평소 브런치를 먹을 일이 없기에 아침부터 신이 났다. 아니 며칠 전부터 신났던 것 같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친한 언니를 만나 브런치를 먹는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왔다.
평소 잘 안 입던 청바지를 입었다. 고무줄 쫙쫙 늘어나는 운동복이 편해 매일 즐겨 입는데 오늘은 청바지다. 운동복을 입고 만나도 되지만 '브런치'를 먹는데 왠지 운동복은 아닌 것 같았다. 청바지에 니트를 입었다. 언니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자 약속 장소에 가기 전 찜질방부터 갔다. 여탕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한참 즐겁게 대화하는데 찜질방에 무슨 일이 있다고 전화가 오면 바로 가봐야 하니 미리 둘러보려고 했다.
여탕 안을 둘러보는데 심상치 않은 걸 감지한다. 바로 하수구가 막힌 것이다. 사우나 앞에 있는 하수구라 사우나하고 나오는 손님들이 불편할게 뻔했다. 청바지를 입어서 나도 불편했지만 당장 '내 친구 뚫어뻥'을 들고 열심히 뚫어 보았다. 뚫어뻥을 뚫는 요령 따위는 없다. 그냥 양팔 가득 힘을 주고 양손을 빠르게 움직인다. 하다 보면 금방 지치는데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이름처럼 시원하게 뻥 뚫리면 좋으련만 뻥 뚫리진 않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뚫어야 한다. 심각해지고 나면 남편이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며 아래서 하수구 배관을 열어야 한다. 그것도 안되면 하수구 업체를 불러 바닥에 물바다를 만들어 하수구를 뚫어야 한다. 그래서 심각해지기 전 뚫어뻥으로 뚫어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약속시간은 이미 다가왔고 언니에게 미리 늦을 거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더 뚫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뚫리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물흡입 청소기를 이용해 고여 있는 물만 제거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입은 청바지인데 더러운 물은 튀고 몸에서 안 좋은 냄새가 밴 것 같다. 그래도 스트레스받는 상황에 좋아하는 언니를 만나니 또 기분은 업된다. 언니에게 오기 전 상황을 하소연하듯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하수구 뚫다 오니 배고파서 브런치는 더 꿀맛이다^^)
여탕 관리자가 되어 보겠다고 마음먹기는 했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쉽지 않다. 특히 내가 해결하기 힘든 일에 부닥치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땐 보통 여탕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밤에 남편과 함께 들어가 해 본다. 그런데 그날은 개인적인 일로 남편이 지방에 가 있어서 함께 할 수 없었다. 남편과 통화 후 하수구 업체를 밤에 불러 뚫어보기로 했다.
밤늦게 하수구 업체와 함께 해결하기로 하고 나니 일단 마음은 편했다. 혼자 해결하는 게 아니라 믿을 구석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아이들 케어를 하고 있는데 뚝섬에서 드론쇼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에 부산에서 드론 쇼하는 영상을 보고 꼭 보고 싶었다. 그런데 뚝섬이라니. 차로 3-40분 거리였다. 이따 밤에 하수구 업체와 함께 작업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거고 물바다가 될 주차장도 치워야 할 텐데. 가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들이 떠올랐지만 마음은 이미 가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드론쇼를 보고 싶었다. 더불어 아이들에게 드론쇼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드론쇼를 보러 갔다.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았다. 편의점에 들러 먹을 것도 사 와서 드론쇼를 기다렸다. 중간에 물 수위가 떨어졌다는 전화를 받고 빨래방 아저씨께 부탁을 했다. 영상통화까지 하면서 물 트는 법을 겨우 알려드렸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드론쇼를 보았다.
1000개의 드론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들을 뽐내며 한강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웅장하고 멋진 노래와 함께 드론들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낼까 기다리고 있으면 다양한 모양들을 만들어 냈다. 시티투어 버스 남산타워 남대문 무지개 분수 SEOUL MY SOUL 등등. 드론쇼 하는 걸 영상으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생경함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아이들도 눈과 입이 동그랗고 커진 모습이다. 바빠서 고민했지만 '역시 잘 데리고 왔어.'라는 생각과 함께 뿌듯하다.
그렇게 드론쇼를 잘 보고 와 아이들을 씻기고 재웠다. 이제 다시 찜질방에 가야 할 시간. 발목 잡는 그놈의 하수구 때문에 하루 종일 난리다. 하수구 뚫다 브런치 먹고 드론쇼 보고 하수구를 뚫게 생겼다. 참 길고 긴 하루다. 아침부터 밤까지 많은 일을 하며 밤 12시부터 하수구 업체와 작업을 했다.
하수구 업체는 부부가 함께 하는 분들이었다. 남자분이 주된 작업을 하고 여자분은 서포트를 했다. 우리 부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 없이 나 혼자 있으니 더 외로웠다. 하수구 업체는 내시경으로 하수구 안을 들여다보며 막힌 곳을 찾는다. 높은 수압의 기계를 이용해 물을 쏘거나 직접 망치로 막힌 곳을 뚫는다. 평소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아 다시 막히면 안 되니, 더욱 시원하게 뚫어 줄 것을 부탁드렸다.
그러는 동안 지하 주차장은 말 그대로 물바다가 되었다. 밤에는 차가 거의 없어 다행이다. 몇 시간에 걸쳐 뚫는 작업이 끝나고 난리가 난 주차장에 물을 치워야 한다. 뚫는데 지쳐 있는 분들에게 미안해서 나도 열심히 돕는다. 물바다가 된 바닥 치우는 요령 따위는 없다. 물치우는 도구로 무한정 왔다 갔다 하며 물을 치우는 거다. 물 흡입 청소기를 이용해 보지만 소용없는 양이다. 몇 시간을 치워야 그 끝이 보인다. 그렇게 왔다 갔다 반복하며 바닥을 깨끗이 치우고 나서야 작업이 끝이 난다. 정말 길고 긴 하루 (아니 새벽 3시니 이틀이라고 해야 하나;;)다.
정말 힘든 하루였지만 그래도 남편이 없었는데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내고 나니 더없는 성취감이 생겼다.
작가님 중에 나의 씩씩함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많이들 칭찬해 주시지만 '뮤뮤' 작가님은 씩씩하고 야무진 여자를 좋아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씩씩하고 야무진 여자'. 나도 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여자로 비추어지는 게 신기했다. 아마도 찜질방이라는 공간에서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일들을 겪어서 인 것 같다. 시행착오도 겪고 별의별 일들을 겪다 보니 그렇다. 그러니 당근에서 280권 중고책을 사는 건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더 힘들고 험한 일도 많이 겪어 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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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함이란 그렇게 생기는가 보다.
그렇게 오늘도 씩씩함이 +50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