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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 고장 나면 애타게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by 다몽 박작까


"여기 좀 와 보세요. 샤워기가 너무 세요. 무슨 폭포도 아니고요."

"들어가면 왼쪽 세 번째 자리요. 수도꼭지 돌리는 게 고장 났어요."

"수도꼭지가 아예 빠졌어요. 손님들 못 써요. "

이런 얘기를 들으며 나는 찜질방 라운딩을 돈다. '라운딩'이라니. 이 단어도 참 오랜만이다. 간호사 시절, 병실마다 환자 상태가 어떤지 돌아보며 수액이 잘 들어가고 있는지 등을 확인했다. 지금은 찜질방 구석구석을 라운딩 한다. 샤워기, 수도꼭지, 조명 상태, 탈의실 환풍기 상태 등을 확인하는 찜질방 박반장 버전으로. 환자에서 고객으로 병원에서 찜질방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돌아보는 마음은 참 비슷하다.


물론 처음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와서 뭐라도 고쳐주거나 해결해 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말하자면 그냥 무해한 배회자에 가까웠다. 마치 병원에서 제 앞가림 못해 허둥지둥 대는 신규간호사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이 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수도꼭지를 고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수도꼭지를 고치는 젊은 여자를 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놀람. 다른 하나는 안쓰러움.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지나가면서 한마디 씩 한다.

"이런 거... 할 줄 아세요?"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아이고 딱하기도 하지. 이런 힘든 걸 여자가..."


놀라움은 약간의 감탄 섞인 호기심인데 안쓰러움은 그야말로 시대적 배경이 녹아든 반사 반응이다. 그래도 나는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드라이버를 손에 쥐었을 때 내가 이곳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생긴 것 같아서.


시작은 결혼 직후, 시아버지가 목욕탕 일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을 때였다. 너무 힘든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나도 내가 수도꼭지를 직접 고치게 될 줄은 몰랐다. 갓난아기 키우는 초보 엄마였고 공구 이름도 몰랐다. 일자, 십자드라이버도 못 구분하던 시절. 그러다 시어머니가 드라이버를 들고 목욕탕에 들어가는 거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목욕하러 가는 길에 엄청 큰 드라이버 한 자루.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사가 헐거운데 있으면 조여야 해. "

아. 이게 찜질방 사모님의 삶이구나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아가씨에게 배우고 남편에게 배우고 틈날 때마다 부품이나 공구와 친해지려고 했다. 어느새 몽키 스패너, 별렌치까지 현란하게 다루는 박반장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탕 전용 기술자'다. 이곳이 여탕이기에 가능한 기술. 남자직원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기에 여자인 내가 도전할 수 있었던 기술.


솔직히 말하자면, 아기 울음소리와 끝나지 않는 집안일보다 수도꼭지 고치는 게 훨씬 더 재밌다. 설거지는 해도 티 안 나는데 수도꼭지는 고치면 바로 티가 나니까. 모두가 씻고 있는 그 여탕 한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드라이버를 돌리고 있는 내 모습. 고요히 나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몰입감. 샤워기 바꿔 달고 수도꼭지 통째로 갈며 고쳐졌을 때의 그 짜릿한 희열. 그 순간만큼은 내 안의 피로와 힘듦도 배수구로 쏴아아 내려간다.






작업은 이렇게 진행된다. 수도꼭지는 일단 드라이버로 물을 왼쪽으로 돌려 잠근다. 그다음에 버튼을 빼든가 샤워기 전환 레버를 바꾸든가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수도꼭지 전체를 통째로 교체한다. 고칠 게 한두 개가 아닐 땐 얼음 동동 '사박이(사이다+박카스음료)'가 필수다. 힘 빠질 때 기력 회복용으로 최고다. 후끈한 곳에서 몸은 덥고 일은 고되다. 그럴수록 탄산과 타우린이 필요하다.


이제는 새로운 기술도 욕심난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라는 말을 다짐처럼 머릿속에 맴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해?" 보다 "어떻게든 해봐야지." 이런 마인드로 말이다. 물론 스트레스는 많다. 그렇지만 스트레스가 많다는 건 지금 내가 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얼마 전 모처럼 가족들과 쇼핑몰 나들이를 갔다. 멋지게 옷을 입고 전시되어 있는 마네킹들을 보는데, 무언가를 보고 매혹당한다. 바로 공구들과 공구 담는 가방이다. 예쁜 가방이나 원피스를 보며 감탄하던 내가 공구가방에 넋을 놓고 보고 있다니.


"저 공구가방 너무 예쁘다."

라고 남편에게 얘기하니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일 못하는 사람이 꼭 장비 욕심내지. "

물론 아직은 남편만큼 기술적으로 능수능란하진 않다. 남편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전문가가 아니어도 원인을 파악하고 어떻게 해결할지 공구통을 열면서 생각해 낸다. 가끔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척척 고치는 건지 신기할 정도다. 반면 나는 아직도 배웠던 거 오랜만에 다시 하면 헷갈려한다. 드라이버 잡을 때마다 이번에 왼쪽이었나 오른쪽이었나 잠깐 멈칫한다. 그러니까 기술적으로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은 초보 박반장이다. 기술은 아직 남편에게 배워야 할 게 많지만 고치겠다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풀옵션 수리공 모드로 장착 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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