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유

내가 나에게 묻다

by 지영민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갑자기 작아져서 비좁은 굴 속에 들어가 꽁꽁 숨고 싶은 날이. 호기롭게 작가가 꿈이라고 큰소리칠 때는 몰랐다. 내가 왜 쓰고 싶어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걸.

불과 8개월 전만 해도 나는 아이들의 코로나 학습을 원격으로 조종해야 했던 기러기 엄마에, 틈나면 대드는 부하직원과 지랄 맞은 상 꼰대 부장 사이에 껴서 홀로 야근하며 컵라면 먹다가 눈물 훔치던 직장인이었다. 어찌하다 벌려 놓은 대학원까지 수습 불가여서, 그야말로 무슨 생각이라는 걸 하며 살기 어려웠다.


내가 무능한 매니저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아픈 남편과 사춘기 아이들 건사하는 걸 핑계로 내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떠났다. 속이 후련했다. 조직생활이 맞지 않았잖아,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자, 더 신나고 재밌게 살 거야, 이러면서 집에 왔다.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8개월 간 무슨 고시 공부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출근 걱정 없이 잘 놀았다. 남편 덕에 이삼십 대에 못 해 본 거 다 해 봤다. 소위 '깔롱'이라는 것도, 집 꾸미기도.


메이크업이란 자고로 줄을 진하게 긋고 파격적인 색감을 써서 '나 화장했음'을 온 천하에 알리되 운전하다가 신호가 걸릴 때마다 짬짬이 작업하여 사옥 현관에 들어서기 전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화장대에 앉아 오롯이 나에게 정성을 쏟는 의식이 되었다. 공을 들여서 양 볼의 기미를 반쯤이나마 가려보고 퍼스널 컬러와 그날의 옷차림을 고려한 색상을 조합하여 비로소 내가 만족할 때 끝이 난다. 시간은 뭐, 많으니까.


집이라고 해 봐야 남의 소유라 급진적인 변화는 어렵지만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배치를 바꾸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렵사리 얻은 휴가기간에 지방에서 올라와 이사하는 바람에 근 1년 간 집은 개판이었다. 큰방은 코로나 학습장으로 아이들이 점령했고, 붙박이장이 딸린 작은 방에서 삼부자가 끼어 잤다. 현관 앞 가장 작은 방에 이모님이 기거하셨고 남는 방은 없었다. 주말에 '방문'할 때마다 언젠가 싹 정리하리라 허공에 다짐만 하다가 1년이 흐른 거다. 그 한을 담아서, 이제 방 세 칸을 각자의 공간으로 분리했다. 예스럽게 좁아터진 부엌에 수납장을 하나 장만해 놓고 어지러운 세간살이를 다 때려 넣고 나니 이제서야 집 같아졌다며 뿌듯해했다.


한바탕 집 정리 후에는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홈트', 그중에서도 필라테스에 빠져서 살았다.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던 차에 재활이나 하자며. 땀 흘리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 찬바람이 부니 야심 찼던 나의 새 출발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반문하게 된 것이다.


이곳 브런치에만 해도 재미난 소재, 화려한 기교, 진한 개성으로 무장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이 많다.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은 이미 누군가 다 써 놨다. 막 돼먹은 상사, 고구마 시월드, 처절한 전투 육아, 질투를 유발하는 화려한 일상, 읽기만 해도 숨찬 홈트, 감성 충만한 여행 등 심금을 울리는 글이 즐비한데, 나까지 하나 더 보탠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런 생각에 '쭈글'해 진 거다.


고맙게도 나를 여기로 이끌어 주신 슬기로운 초등생활의 이은경 작가님이 그러셨다. 최소 3년 간 꾸준히 읽고 써야 그제서야 작가로서 이러고저러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 3주도 안 된 내가 이럴 자격은 없다. 이 질문의 답은 마늘과 쑥을 먹으며 3년짜리 답지에 써야 하나보다.


*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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