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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Oct 31. 2023

일교차가 커지면 찾아오는 병(病)

요리 똥손이 꼼짝없이 소고기 죽을 끓이는 날

  '여름도 다 갔는데 이제는 괜찮겠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면, 비좁은 냉장고 대신 베란다에 냄비를 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는 이런 시기에 등장한다, 우리가 음식 관리에 소홀해진 환절기에.


  "엄마, 배가 부글거려요."     

  '지난주에 장염으로 고생하다 겨우 나았는데 재발한 건가?'     

  출근해야 했던 엄마는 도리질 치며, 학교 쪽으로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하긴 나도 요 며칠 속이 부글거렸다. 엄마 같았으면 수시로 수저, 도마, 컵, 수세미를 삶고 햇볕에 내다 널었을 거다. 정수기가 아무리 좋아졌다지만, 환절기에는 물도 좀 끓여 먹는 게 좋아, 그러셨을 거다.




  퇴근하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허기져서 보채는 두 녀석을 먹이고, 빨래, 설거지, 청소를 하고 나면 11시다. 손이 느린 편도 아닌데, 특별한 반찬거리를 만드는 것도 아닌데, 저녁 7시부터 꼬박 서너 시간은, 낮 시간 일터에서보다 더 쫓긴다.


  '요리와 애들 사교육은 전문가에게'     

  내가 굳게 믿고 실천하는 생각이다. 살인적인 일정에 요리까지 시도했던 과거가 있다. 애들이 씻는지, 숙제를 하는지 봐 줄 틈 없이 등을 돌린 채, 씻고 벗기고 썰고 볶고 끓였다. 가뜩이나 부어 있던 종아리는 그 사이 더 묵직해졌다.


  한 주먹만 한 깻잎순과 콩나물 무침이 완성된 것을 기뻐하려는 찰나, 음식물 쓰레기와 냄비, 믹싱볼로 난장판이 된 싱크대 앞에서 울상이 되었다.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그때, 아이들이 그제야 샤워를 한다, 숙제를 한다 미적거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내 머리에서 화산이 분출했다.


  요리를 덜어내고 사는 요즘, 이삼일에 한 번은 퇴근길에 밀키트를 파는 무인 가게와 그 옆 반찬 체인점에 들러,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장바구니를 채운다.

  '배달음식이 아닌 게 어디야.'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변명을 하면서.

     



  1시쯤 아이의 담임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고, 배가 아프고 어지럽다는 아이는 조퇴했다. 아이는 집에 누워있다가, 혼자서 씩씩하게 소아과 의원 진료를 받았다.


  설사하고 음식을 못 먹었으니 탈수상태가 될까 봐 걱정이었다. 물을 미리 끓여놨어야 했는데, 엄마 말 안 들은 걸 후회해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서 수시로 마셔야 한다고 타일렀다. 혼자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서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어떤 음식이 잘못되었던 걸까? 혹시 얼음이나 물이 잘못된 걸까? 집밥이 상했던 걸까? 급식이 문제였을까? 하굣길에 친구들과 군것질을 했던 게 탈이 난 걸까? 여러 가설을 세워보지만 검증할 길은 없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멀쩡한 제빙기와 정수기를 놔두고 보리차를 끓이는 것, 그리고 인스턴트 죽을 사 먹인 것을 반성하며 손수 소고기 죽을 끓이는 것이다.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추어 예약 취사가 끝났을, 현미잡곡밥이 밥솥 한가득이었지만, 백미 한 대접을 씻은 후 물에 불린다. 쌀이 물을 먹는 동안 소고기를 잘게 썬다. 엄마는 믹서에 가는 것보다 식칼로 썬 게 더 맛있다고 하셨다. (한국 음식은 이런 식으로 엄마들을 괴롭혀 왔고 오늘은 나도 예외가 아니다.) 지방을 만나면 흡수가 더 잘 된다는, 비타민 A 그득한 당근을 잘게 다진다. 단맛을 더해 줄 양파도.


  퉁퉁 불은 쌀은 들기름에 볶는데, 약간 눌게 하면서 쌀알이 부스러지도록 한다. 그래야 하루종일 곡기를 못 먹어 기운 없는 아이가 씹는 힘이라도 아낄 수 있으니까. 따로 놀던 쌀알들이 익으면서 약간의 끈기가 생긴다 싶으면, 다진 재료들을 넣고 같이 볶다가 물을 넉넉히 붓는다.


  냄비 바닥을 훑듯이 슥슥 젓다 보면 자꾸 쌀이 불으면서 물이 없어진다. 물을 몇 번씩이나 부어가며 젓고 또 저으면 뿌옇고 눅진한 죽이 완성된다. 너무 센 불에 죽을 끓이면 냄비 바닥에 눌어붙는 것도 문제지만, 부글부글 끓던 죽이 손이나 손목에 튀어 화상을 입기도 한다. 죽 끓이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니, 나는 요리똥손이 확실하다.


  "자, 참기름 한 숟갈, 간장은 조금만 넣는다. 싱거운지, 짠지 어디 한 번 먹어봐."

  어지럽다며 힘 없이 밥상 앞에 앉은 아이는, 후후 불어가며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간이 딱 맞다, 고기가 많고 당근이 잘게 썰려서 좋다, 요리똥손의 가상한 노력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아이의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딸기 스무디와 유제품은 당분간 금지다. 차고 달고 식이섬유가 많은 음식은 위장운동을 자극하고, 위장 안에 수분을 끌어들여서 설사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철저히 냉장보관해야 한다. 낮 기온이 아침보다 10도 이상 오르면서 실온에 보관한 음식에서 미생물이 번식하기 쉽다. 먹다 남긴 음식은 쉬이 상하니, 한 번에 먹을 만큼만 조리해 상에 낸다. 점심으로 김밥, 샌드위치를 사 먹으려다가 참았다. 당분간은 충분히 가열해서 익힌 음식만 먹기로 한다.


  아이는 소아과 의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두 번 먹고, 죽 두 그릇을 먹었다. 증세가 누그러지고 영양 보충을 한 후 기운차린 아이가, 자려고 누운 자리에서 말했다.

  "엄마, 기분 좋으라고 지어낸 말이 아니고, 엄마가 죽을 잘 끓이시는 거 같아요. 팔아도 되겠어요."     

  "아이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맛있게 먹었다니 기쁘네." (시장이 반찬이구나.)




덧) 요즘, 가을철 식중독을 경고하는 기사를 읽게 됩니다. 충분히 가열한 음식을 먹고, 남은 음식은 철저히 냉장보관해서, 이번 가을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참, 물과 비누로 자주 손 씻는 건 기본입니다.


*참고 : 서울대학교병원 N의학정보 - 급성대장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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