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팬트리는 존재하는가. 사실 펜트리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래서 전쟁이 나면 어쩌지 가끔 상상하기도 하지만, 대충 비상식량을 쟁여두는 의미의 작은 팬트리 공간이 있다. 공간이라고 하기도 뭣한, 싱크대 하부장 한 칸이 우리 집 팬트리의 전부다. 평상시 그곳엔 라면 10개, 스팸, 김, 파스타, 카레분말 정도가 자리 잡고 있지만 가끔은 애 아빠가 사 오는 4개짜리 묶음의 과자나 정체불명의 젤리, 사탕이 놓이기도 한다.
이렇게 별 것 없는 그곳을 아이는 매일 뒤진다. 밥을 먹고 나면 으레 그곳의 문을 열고 달달한 뭐라도 없나 열심히 뒤진다.
이곳을 비워야 한다. 아무것도 없으면 포기하고 말겠지. 가끔은 야박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이의 몸무게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열심히 비우기로 결심한 지 오래다.
간식으로 과일을 먹으면 어떠니?
과일을 잘 먹던 아이는 살이 찐 후로 시큼한 과일을 입에 잘 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입맛이 변해가는 중이다. 귤을 박스채로 까먹던 아이는 과연 존재했던 것일까.
달달함은 시큼한 과일을 몰아내는 중이다.
너의 변한 입맛을 돌려야 한다. 달달한 간식을 추방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첫 번 째 계획이다. 어린 아이라 디톡스를 시켜줄 순 없지만(시켜야 하나) 서서히 너의 변질된 입맛을 돌려놓아야 한다.
그런 결심을 한 날 밤, 애 아빠는 짜잔 하며 과자봉지와 초코파이, 탄산 두어 개를 들고 나타났다. 이런 웬수....어쩜 이렇게 도와주지 않는 것일까. 눈에 안 보여도 끊기 어려운 걸 굳이 짜잔 하며 들고 나타나는 인간.
복장이 터지지만 입을 꾹 다물고 최대한 손길이 닿지 않는 싱크대 위쪽에 과자봉지를 처박는다.(아주 세게 처박는다)
과자는 장롱으로!
옷을 개어 옷장에 정리하다 보면 남편의 장롱 제일 위칸엔 간혹 꼬깔콘이 누워있다. 안 보이게 두었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라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일어나 주방에 나오면 나도 모르게 휴지통을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다. 어젯밤 또 초코파이를 까먹었군. 쯧쯧쯧... 그리곤 그 흔적을 다른 쓰레기와 뭉쳐 아이 눈에 안 보이게 깊이 박아 버린다.
아빠는 먹는데 나는 왜 안돼!
(할 말 없음...)
이런 말을 막으려면 쓰레기통에 손을 넣고 증거물을 깊이 박아버리는 수밖에 없다. 아이 앞에서 몇 년 동안 책을 읽어도 책 읽는 아이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데, 좋은 것을 배우는 데는 수년이 걸리는 반면 나쁜 것은 순간적으로 흡수해 버린다. 힘 빠지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다 먹어 없애버릴까.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서서히 내 살이 찌고 있는 요즘. 끊어야 한다. 끊을 수 있다.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내 방엔 커다란 팝콘 한 봉지가 있다. 그것이 내 맘에 걸린다.
어느 날 저녁, 선심 쓰듯 커다란 쟁반에 팝콘을 수북이 부었다. 아이의 눈이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먹자! 다 먹어치우자! 이게 마지막 과자다!
아이의 불룩한 배 위로 찢어진 배꼽이 웃고 있었다.
배꼽!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