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을 해야 해! 1

by 이다

의도치 않게 일을 그만두고 내리 한 달을 잤다. 그리고 한 달을 자는 동안 14킬로가 다시 불었다. 누워서 돼지만 됐네. 뭐 별로 먹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살은 왜 쪘담.


몸은 나아졌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까스로 공주의 성을 빠져나왔기에 다시 돌아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신기한 건 공주를 안 보자 그동안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그녀를 안 보니 살 것 같았다.




갑자기 엔도르핀이 돌면서 뭐라도 하고 싶은 에너지가 마구 솟아올랐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어. 일하는 틈틈이 염탐은 해두었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손가락이 어느새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나 이탈리아로 떠나야겠어!'


그 이름도 생소한 관광대국 이탈리아. 이탈리아를 선택한 이유는 조금 웃기다. 그때까지 영어를 배웠어도 영어로 말할 수 없었다. 프랑스어를 열심히 했지만 아는 만큼 그 언어가 두려웠다. 무슨 배짱인지 알파벳부터 처음 배워야 하는 언어인 그 이름도 생소한 이탈리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작정하고 나니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나갔다.


우선 학원을 정한다. 뭐가 됐든 이탈리어를 배운다. 왜냐고. 난 그곳에 가야 하니까. 이 작은 불꽃이 마음에 일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교대부근에 소문난 이탈리아 어학원에 등록을 했다.


'27살에 나 뭐 하는 거니.'


미래에 대해 준비도 해야 하고 자리도 잡아야 하는 시기에 어딜 가겠다는 거니. 하는 마음이 슬쩍 들었지만 이미 마음의 불을 끄기엔 너무 늦었다. 해보자. 한번!


고백하건대 학창 시절, 언어를 우습게 봤었다. 영어공부도 그렇게 했다. 거기엔 이상한 논리가 있었다.


'영어는 언어잖아. 언어는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달달 외워야 하는 거야?'


이런 생각에 영어를 독파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런대로 점수를 받았기에 더 안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는 다르다. 난 그곳에 가야 한다. 곧 그 언어로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난생처음 말을 배우기라도 하는 아이처럼 언어를 쭉쭉 흡수하기 시작했다.


abcdefg 알파벳은 영어와 같지만 발음이 다르다. 그래도 히라가나처럼 완전히 다른 모양이 아니어서 나름 할만했다. 그렇게 자음부터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아 베 췌 데 에 에프 줴...


궁하면 통한다고 했나, 아니면 그만큼 두려웠던 걸까. 의외로 언어를 습득하는 속도가 빨랐다. 이탈리아 유학을 위한 어학원이었기에 강의는 빈틈 없이 진행되었다. 클래스의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이 성악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었다. 오페라딕션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탈리아어 맛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알파벳을 배우는 나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상관하지 말자. 난 abcd부터 시작하는 거야. 게 중엔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도 한 명 있었다. 늦깎이 우리 둘은 참 열심히도 수업에 참석했다. 원어민 선생님 2강의, 한국인 문법선생님 2강의. 하루 강의는 이렇게 4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원어민 선생님이었던 마리아끼아라는 무서웠다. 외국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열성적이었고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모든 수업을 이태리어로 하고 학생 개개인에게 그날 배운 것을 속사포로 질문해 댔다. 아, 부담스럽고 무서워. 이거 뭐 고등학생시절 수학시간 같잖아. 움츠러드는 마음은 점점 거세어 갔다.




몇 번의 강의 시간이 지나자 눈에 띄게 마리아끼아라의 강의 출석률이 떨어져 나갔다. 나만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구나. 나도 슬며시 뒷걸음질 쳐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곧 저런 원어민들하고 같이 말해야 한다고. 이런 부담감이 나를 그 자리에 있게 했다.


'이건 내가 결정한 거야. 빠져나갈 수 없어. 당당해지자!'


이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그 수업에는 나와 나이 많은 언니만 출석하고 있었다. 더는 피할 수가 없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해. 나는 그렇게 아기가 엄마라고 입을 떼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열정적인 마리아와 나, 언니 이렇게 셋 뿐이었으므로. 그리고 난 원래 좀 수다스러운 사람이었으므로.


14킬로 도로 찐 살은? 다행히 5킬로 감량 중이었다. 우헤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