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너스 10킬로그램을 겨우 유지하며 취업에 성공한 내 이름은 이냉이, 봄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리고 어느덧 4월, 봄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매일의 일과는 똑같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조수미의 클래식 아리아를 크게 틀어 놓는다.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대충 청소를 하면 지난밤 먹었던 라면과 치즈크림으로 퉁퉁부은 얼굴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몸을 움직이니 조금은 개운해진다. 커피를 한잔하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하며 자리에 앉는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예쁜 여자는 실제로 처음 보았다. 그런 그녀가 내 실장님이다. 키는 170cm 정도에 늘씬한 팔과 다리, 조금 흠이라면 얼굴이 살짝 길다. 그런 얼굴을 커버라도 하는 양 앞머리를 내렸다. 등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중요한 일과는 출근하자마자 시작되는 꽃단장이었다. 갈색 머리를 정성스럽게 고데기로 말고 커다란 눈에는 매일 풍성한 속눈썹을 붙인다. 나는 그 모습을 매일 바라본다. 어떻게 매일 속눈썹을 붙일 수 있는 거지? 불편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무색하게 속눈썹을 3년 내내 붙였다고 했다. 그녀의 꿈은 인형이었다.
아르데코 스타일의 콘솔 위에 놓인 유럽풍 인형. 움직이면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던 인형이 그녀가 닮고 싶은 모습이라고 했다. 그 모습이 되기 위해선 속눈썹을 붙이는 게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두껍고 길게 뺀 아이라인까지 완성하면 영락없는 인형이 된다. 아침 화장을 마친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다. 아무도 입지 않을 법한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는다. 그 또한 완벽한 인형의 옷이다. 아침 단장을 마치고 나면 그녀는 완벽한 인형으로 변신한다. 발음마저도 앳된 인형으로.
손님이 들어온다. 까다롭기라면 어떤 누구보다도 까다로운 손님들이다. 인생 최고의 날을 기대하는 손님이기에 이해한다. 그 앞에선 마땅히 그런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최고의 대접을.
그런 그녀의 최고 무기는 인형비주얼과 인형옷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넋을 읽고 침을 흘린다. 인형이 말하는 것에 대체로 수긍하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또 다른 인형들이 되어버린다.
그녀가 참 신기했다. 인형이 꿈인 그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녀가 몹시도 불편했다. (나는 무수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대체로 쌀쌀맞았던 그녀가 웬일인지 내게는 무척 친절했다. 장난 삼아 이냉이라고 이름 붙인 나를 귀여워했다.
"우리 평생 같이 일하자. 넌 디자인을 해, 난 회사를 경영할게"
"아, 네..."
황금바늘과 실을 가지고 태어났다던 그녀는 나에게 종종 그런 말을 했다. 같이 일할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어디 가서 사주도 봤다고 했다. 나 또한 실장님과 함께 멋진 옷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째 나에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 내내 아방가르드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는 도당최 레이스와 비단의 세계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로 느껴졌다.
일주일이면 옷을 만드느라 밤을 지새우는 날이 3-4일이나 계속되었다. 2-3시까지 잠을 안 자고 해 왔던 수많은 밤들이 무색하게 빠릿빠릿하던 내 몸과 마음도 조금씩 지쳐갔다. 그럴 때면 한눈을 팔았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한동안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남는 날이면 조금씩 다른 세계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해외로의 도피, 뭐 그런 상상 말이다. 마음이 떠나면 몸도 떠나는 것일까. 촬영을 앞두고 여느 때와 같이 3-4일씩 밤을 새우던 어느 날, 사달이 났다. 일하는 중인데도 몰려오는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3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잠깐 눈 좀 붙여"라는 말에 그대로 엎어져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잔 것일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몇 시쯤이나 된 걸까. 시계를 확인하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저녁 8시.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난 그 시간까지 무려 5시간을 잤다. 미쳤군. 일하러 와서 5시간이나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날 이후로 깜박거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정신이 그 지경에 이르니 몸까지 제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숨어있던 아토피가 올라오고 쉬는 날이면 병원을 투어 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러면 안 되겠어. 쉬어야겠어.
평생을 같이 일하자던 약속을 뒤로하고 한 달을 쉬겠다고 선언했다. 의외로 그녀는 나의 선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 내리 한 달을 누워있었다. 한 달을 누워있었지만 몸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설상가상. 누워만 있어도 밥은 꼬박꼬박 먹었더니 그새 10킬로가 불어있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종합건강검진을 예약했고 난생처음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이란 걸 받았다.
결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몸이 스트레스에 극도의 발악을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더 이상 공주랑 같이 지내는 건 무리였다. 공주만 내 앞에서 없어지면 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그렇게 공주의 성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대학 4학년에 뺐던 14킬로그램을 고대로 다시 얻은 채.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