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트 크로포드에서 트레일러닝 따라 하기
숲이 고파서
아침저녁으로 훅 끼어드는 차가움이, 이제는 두툼한 외투를 꺼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5월이다. 그런데 그 차가운 공기, 막상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 괜히 새 방으로 이사 온 기분이 든다. 낡은 공기를 다 내쫓고, 신선한 공기로 환기하는 셈이다. 덕분에 추위는 조금 성가셔도, 숨 쉬는 맛이 제법 근사하다.
그럴 때면 달씨는 숲이 고프다. 키 큰 소나무며 전나무, 유칼립투스가 늘어선 오솔길을 걸으면서 숨을 돌린다. 일상과 자연을 한 번에 환기시키는 셈이다. 달씨는 숲멍족이다. 애들레이드에서 1시간만 가면 만나는 거대한 숲, 마운트 크로포드 (Mount Crawford)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남호주 해안의 기후는 지중해성과 비슷하다. 여름에는 다른 주보다 훨씬 건조하여 잔디는 물론 사람 피부까지 푸석푸석하다. 여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면 낮은 온도와 함께 습윤하여 피부 주름도 조금 펴지고, 잔디며 나무들도 초록초록해진다.
그 숲으로 가자!
일 년의 반은 건조함으로 부쉬파이어(Bush fire), 즉 산불의 위험이 큰 기간은 간단한 바비큐 용 외에는 뒷마당이든 캠핑장이든 불을 피울 수 없다. 그 기간은 매년 11월 1일-다음 해 4월 30일까지이다. 요이 땡!처럼 5월 1일이 되면 달씨 가족, 곰 4마리는 숲 속으로 갔다. 하지만 올해 5월 첫 주말은 애들레이드 마라톤에게 양보했기에 다른 주말을 찾았다.
돌아보면, 그 숲은 달씨가족의 성장사가 고스란히 배여있는 곳이다. 호주에서의 캠핑이란 어떤 걸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민도 육아도 초보인 부모가 어설픈 장비들을 가지고 처음 와본 곳. 아장아장 걷던 아이들과 나뭇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신발 빼고 다 구워 먹는다는 한민족답게, 고기와 생선, 고구마, 오징어, 가래떡, 심지어 마시멜로까지 함께 구워 먹는 즐거움을 나눴다. 아이들은 나무껍질을 떼어 곤충을 찾아내고, 지나가는 캥거루 떼에 깜짝 놀라며 숲을 가로지르곤 했다.
밤이면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추고, 아빠의 무서운 이야기를 들을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전기가 없는 캠핑장에서 침낭 속에 파묻혀 밤을 보내고, 빗소리를 들어가며 새벽을 맞기도 했다. 아침이면 숲 속 새소리가 합창하듯 울려 퍼지고, 입김을 후후 불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넓은 캠프사이트에서 어린 시절에는 공놀이와 잡기놀이로, 조금 더 커서는 자전거를 타며 숲길을 달렸다. 강아지를 데려온 첫날, 함께 뛰놀던 숲이기도 하다. 이제 아이들은 더 컸다고 전동 스쿠터를 타며 숲길을 달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달씨도 달라졌다. 전에는 천천히 걷기를 즐겼던 모양에서 이제 이 길을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하고 있다.
숲길을 달리기
"숲길을 달리는 것을 트레일러닝이라고 한다지?"
아무나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나 할 수도 있지?"
달씨는 생각했다.
천천히 달려보기 시작했다.
길의 끝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캠프사이트에서 멀어질수록,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다 깜짝 놀라는 캥거루들 외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달리는 사람도 없었다.
달씨는 잠시 움찔한 마음도 들었지만, 아스팔트 도로와 달리 흙길이 주는 편안함과 자유함이 너무 좋아 조금씩 더 가보았다. 보이는 것은 나무, 돌, 흙, 꽃, 캥거루 똥, 푸른 하늘, 그리고 자연의 한 조각 사람. 보이지 않는 것은 공기, 바람, 햇살. 말소리나 시끄러운 소리는 없다.
이 모든 것을 한 시간이라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귀한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매년 트레일 러닝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원하든 아니든 경쟁심이 발동될 수밖에 없는 대회로 이 길을 달린다면 덜 누릴 것 같았다. 흠뻑 누리는 혼자만의 트레일로 족했다.
텐트 밖은 오로라
이 시기에는 가끔 호주에서의 오로라 소식이 뜬다. 주로 태즈메이니아에서 관찰되지만 최근에는 멜번이나 애들레이드에서도 목격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는 달씨. 하지만 오로라를 보러 어딘가에 가야지 하는 꿈은 없었다. 노르웨이를 가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오로라를 꼭 보고픈 위시리스트는 없었다.
하지만 인생에서 종종 예기치 않은 시험을 만나듯,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만나기도 한다. 달씨 가족이 텐트를 치고 저녁 준비를 하던 날이었다. 저녁 하늘색이 유난히 짙은 보라와 여러 컬러들이 섞여있었다. 달씨 아들은 사진을 찍으며 "왜 색이 이렇게 나오지? 카메라 렌즈에 문제 있나?" 처음 보는 색들이었다.
SNS에 오로라 소식이 전해졌고, 그제야 달씨가족을 둘러싼 광경이 '오로라'인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텐트 밖은 오로라였다. 오로라를 만났다.
'오로라 앞에서 스마트폰 사진을 논하지 말지어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초록빛과 보랏빛 장막을 레이저쇼와 견주지 말지어다.
벅찬 감동과 자연스레 딸려오는 경이를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말지어다.'
이제 달씨는 오월이 되면 오로라를 그리워하겠지?
보라로 물든 가족들과의 추억 그리고 그 숲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