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약 한 달여 앞두고 남편과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자동차로 그냥 편안하게 좋은 곳 구경하고 맛난 거 먹으며 즐기는 여행보다는 뭔가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마침 그즈음 우연히 유튜브로 KBS의 다큐 3일을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에서 제주도 환상 자전거길에 도전하는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60대 이상 여성 실버 자전거 동호회 멤버들도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91세 되신 어르신도 있었다. 젊은이들도 힘든 일인데 어떻게 환갑이 훨씬 넘으신 어르신들이, 그것도 지금 90세가 넘으신 분이 234km 되는 장거리 라이딩에 도전할 수가 있을까? 영상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곤 곧바로 나도 한번 해봐?라는 다소 충동적이고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이 들면 일단 실행에 옮겨보는 평소의 성격대로 남편에게도 제안하고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자전거 주행 실력이다. 한 번도 하루 이상 연속해서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고 장거리 여행은 해본 적이 없는 나였다. 그저 1년에 한두 번 탈까 말까 하는 정도의 완전 초보자다. 너무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91세 어르신의 자전거 타는 모습이 나의 그런 걱정을 붙잡았다.
1년 넘게 창고에 방치하다시피 한 자전거를 꺼내보니 손잡이와 바퀴의 고무가 다 삭아 있었다. 자전거 샵에 맡겨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바람도 넣었다. 요즘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따릉이’에 가입해 자전거로 퇴근하며 자전거와 친해지는 연습도 했다.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일단 자전거를 제주도까지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남편과 나는 바이크 트립에서 제공하는 배송 서비스를 이용했다. 물론 직접 제주공항까지 갖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면 자전거를 일주일 전에 자전거 샵에 갖다 주고 제주에 도착해 찾으면 되는데 비용은 자전거 종류와 무게에 따라 왕복 7~9만 원 정도 든다. 현재 수도권에서는 청라와 일산 두 군데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보통 자전거 마니아들은 제주 환상 자전거길을 2박 3일 일정, 혹은 1박 2일 일정으로 완주하기도 한다. 남편도 혼자 탄다면 이틀이면 가능할 텐데 초보자인 나에 맞추어야 하니 날짜를 여유 있게 잡았다. 숙소와 식당은 정하지 않고 현지에서 알아보기로 했다. 자전거 환상길이 총 10개의 코스이기에 대략적으로 하루 두 개 코스 완주를 목표로 삼아 우리는 5일 정도 예상을 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제주 환상 자전거길은 총 10개 구간, 거리는 234km다. 보통 시계 반대방향으로 타는 것을 추천하는데 그 이유는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달려야 아름다운 제주바다를 마주 볼 수 있어서다. 출발지는 공항에서 약 2km 거리에 위치한 용두암이다. 공항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바이크 트립에서 자전거를 찾아 용두암으로 출발했다.
첫째 날 : 1코스: 용두암 ~ 다락쉼터 21km
2코스: 다락쉼터~ 해거름 마을공원 21km 총 42km 주행
둘째 날 : 3코스 : 해거름 마을공원 ~ 송악산 35km
4코스 : 송악산~ 법환 바당 30km 총 65km 주행
셋째 날 : 5코스 : 법환 바당 ~ 쇠소깍 14km
6코스 : 쇠소깍 ~ 표선해변 28km 총 42km 주행
넷째 날 : 7코스 : 표선 해비치 해변 ~ 성산일출봉 22km
8코스 : 성산일출봉 ~ 김녕 성세기 해변 29km 총 51km 주행
다섯째 날 : 김녕 성세기 해변 ~ 함덕 서우봉 해변 9km
함덕 서우봉 해변 ~ 용두암 25km 총 34km 주행
제주 환상 자전거길에는 각 코스 시작점에 폐 공중전화부스를 재활용해서 만든 빨간색의 인증센터가 있다. 용두암, 다락쉼터, 해거름 마을공원, 송악산, 법환 바당, 쇠소깍, 표선해변, 성산일출봉, 김녕 성세기 해변, 함덕 서우봉 해변 등 모두 10군데다. 그동안 제주도에는 몇 번 가 봤지만 기억나는 곳이 18년 전에 두 딸이 어렸을 때 함께 갔었던 테디베어 박물관과 성산일출봉, 천지연폭포 정도다. 하지만 두 바퀴로 만나는 제주는 색달랐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검은색 돌, 그리고 파란 하늘은 눈 길 머무는 곳이 모두 절경이다. 쭉쭉 뻗어있는 야자수 나무들이 우거진 해안 길을 달리다 보면 동남아 어느 곳에 여행을 왔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국적인 모습을 눈에 가득 넣고 가다 보면 어느새 세상의 모든 시름이 다 날아가는 느낌이다.
유튜브찍고 있는 작가(주피디의 역사여행)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점은 제주 환상 자전거길이 100% 환상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가끔 시내 도로를 달릴 때면 차들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고 종종 업힐 도로에서는 정말이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땐 다시는 낳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 아이의 해맑은 배냇짓을 보며 모든 시름을 잊게 되는 것처럼 푸른 바다가 펼쳐진 해안도로에 들어서면 고생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나는 하루 2개 코스 씩 4박 5일 일정으로 제주 환상 자전거길 234km를 완주했다. 장거리 라이딩이 처음이라 중간에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진 않을까 하는 점이 가장 큰 우려였는데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록 충동적인 시도였으나 막상 이루고 나니 뿌듯함이 밀려온다. 다음에는 한라산 등정과 제주의 올레길도 도전해보고 싶고 제주 오름도 가 보고 싶다.
음식 이야기를 빠뜨릴 뻔했다. 특별히 맛 집을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을까? 모두 성공했다. 제주도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흑돼지구이, 갈치조림, 성게 미역국, 보말 칼국수, 돔베고기, 고기 국수 등 라이딩을 마친 후 찾아갔던 모든 음식점이 다시 찾고 싶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숙소 또한 예약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리조트, 호텔 등 다양하게 있으니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선택하면 된다. 두 바퀴로 가며 훅 지나치지 않고 의미 있는 장소를 만나면 제주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하며 유튜브를 찍었던 것이 특히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글을 보며 혹시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분이 한 분이라도 생긴다면 나의 도전기는 나름 성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작은 몸짓 하나가 누군가에게 희망의 씨앗이 된다면 그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