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위해 시곗줄까지 바꿨단 말입니다!
그래, 좋아. 그날 시간 돼.
휴직을 하고 나니 오히려 주말보다 평일이 더 널널하다. 첫째가 학교에 가기 때문에 둘째만 돌보면 되므로. 그러나 친구들은 대부분 워킹맘이거나 워킹...암튼 직장인이라 평일엔 약속이 없다. 주말엔 애 둘 똑 떼어 남편에게 맡기고 나가면 좋겠지만 우리의 생계를 위해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을 한다. 덕분에 주말엔 첫째까지 찐 독박육아, 아니 독점육아다. 모유수유를 하지만 젖병도, 분유도 별 거부가 없던 둘째가 최근엔 젖병을 거부하기에 누가 봐준대도 약속을 잡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냥 약속이 없다. 결혼 전엔 약속이 없는 날이 없어서 남편이 썸남이던 시절엔 본의 아니게 계속 “그날은 안 돼요.”를 외쳤더랬는데.
대학 동기 여덟 명 모두 결혼을 하고 인천, 서울, 경기, 강원도에 흩어져 살다 모처럼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10년이 넘도록 생일마다 모이고 있지만 결혼하니 각자 챙겨야 하는 행사가 늘어 날짜 맞추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애까지 낳고 나니 날짜가 된 들,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갑작스럽게 불참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달에도 분명 다 같이 모이려 했는데 두 친구가 이사와 아이의 감기로 불참했던 터라 날짜를 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난 약속 없는 휴직자 아닌가. 호기롭게 말했다. “그래, 좋아, 그날 시간 돼. 난 다 돼!”
‘언니, 우리 그날 물총싸움, 알지? 진짜 한다!’
아뿔싸. 카톡을 받고 진짜 싫어하는 이중약속을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애 낳을 때 뇌도 낳는다더니, 둘을 낳았더니 단기기억은 아예 저장이 안 되는 게 분명하다. 남편 회사 동기 야유회를 1박 2일로 가면서 저절로, 아니 강제로 비자유부인이 된 아내들끼리 만나 애들과 함께 비 안 오면 물총싸움을 하고 놀고먹고 1박을 하자 했던 그날이랑 겹쳤던 것이다. 결국 두쪽 모두에 사실을 고하고 장소와 시간을 조정하여 약속 1에서 일찍 나와 약속 2에 조금 늦게 참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는 것은 두 곳에서 엄청 먹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토요일 약속 1 장소로 출발 전 달리기를 했다. 식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뛰어왔지만 이틀 동안 고칼로리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심박이 좀 안정되고 뛰는데 드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남편이 조언한 대로 거리가 아닌 시간을 기준으로 뛰기로 했다. 그동안 3km를 뛰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젠 그 키로수를 뛰고도 남을 시간인 30분을 뛰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하지만 3.6km를 뛰고 들어와 버렸다.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연어 포케, 불고기 포케, 치즈 치킨 떡볶이, 로제 떡볶이, 김말이, 만두, 야채 튀김, 순대, 곤트란쉐리에의 샌드위치, 소금빵, 커피밀크셰이크 등등..... 손가락이 부족할 만큼의 음식을 먹어치우며 주말을 보냈다. 이러다 분명 초밥으로 되찾은 몸무게 앞자리 ‘6’이 공고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비가 온다.
그렇다. 달리지 못할 단 한 가지 이유는 ‘비’다. 추울 땐 안 달려 봤으니 모르겠고, 더우면 해를 피해 새벽이나 늦은 밤에 달리면 된다. 애가 있어 아무 때나 나오기 어려우나 소요시간이 길지 않으니 수유만 끝나면 다음 수유텀 안에 충분히 달리고 돌아올 수 있으니 문제없다. 그러나 비가 오면? 달릴 수 없다. 발이 묶인다.
주말을 보내고 나니, 역시나 앞자리는 여전히 6인데 비가 온다. 강박처럼 ‘달려야 하는데’ 생각한다. 졸리다고 우는 둘째를 아기띠하고 씩씩하게 학교에 혼자 가는 첫째를 배웅하는데 비가 멈췄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흐리길래 학교 사물함에 접이식 우산을 두고 다니는 첫째에게 서둘러 학교에 가라고 말했다. 갑자기 비가 오면 집으로 오지 말고 뛰어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바랐다. 비야, 오지 말아라. 그새 잠든 둘째를 얼른 침대에 눕히고 골반 스트레칭을 했다. 목, 어깨, 허리, 다리가 바르지 못한 자세 때문에 아프다고 하여 골반 스트레칭을 틈틈이 하려고 시도하나 거의 매일 실패하지만 비 때문에 달리기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누워 스트레칭을 했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골반 교정에 집중을 막 하려던 찰나, 으에엥- 낮잠을 짧게 자는 둘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젖을 물려 배를 채우고 컨디션을 살피다 운동복을 입었다. 저번 달리기 때 시곗줄이 헐거워서인지 심박수가 측정 안 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시곗줄도 바꿨다.
둘째 기저귀를 갈아주고 외출복을 입혔다.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썼다. “딸, 나가자. 산책하자.” 유모차에 앉히니 인상을 쓰고 배를 튕기듯 반항했다. 눈도 깜짝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차, 선글라스를 깜빡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틈에 선글라스를 얼른 챙기며 그 옆에 둔 무릎보호대도 낚아채듯 챙겼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타자마자 선글라스를 쓰고 무릎보호대를 찼다.
엄청 흐린 것 같았는데 나와보니 생각보다 밝았다. 선글라스를 챙기길 잘했다 생각하며 유모차를 힘차게 밀었다. 머리가 많이 흔들리면 안 좋을 테니 걷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지만 발을 교차로 디디며 천천히 달렸다. 오늘은 내 러닝메이트가 되어달라며 둘째를 어르고 달래느라 호흡이 엉망이었다. 습도가 높아 땀은 더 쉬이 흘렀다. 흐린 날씨에도 자외선 지수가 높으니 선크림을 꼭 발라야 한다더니 팔다리도 익기 시작했다. 사이클을 취미로 했던 남편의 피부가 밝은 색에서 초코색으로 변했던 게 떠올랐다. 맨다리임에도 커피스타킹 신었냐는 오해를 받곤 했는데 분명 초코, 아니 99% 다크 초코색으로 변하겠다 생각하며 달렸다. 달리며 생각했다. 비만 안 오면 무조건 달릴 수 있겠구나 하고.
찰박!
2주 이상 지속될 거라는 장마기간에 잠깐이라도 비가 멈추면 이렇게 나와야지 했는데 이런, 물웅덩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배수가 원활하여 작년에 서울에서 승용차 위에 사람이 서서 구조를 기다릴 정도로 기록적 폭우가 왔을 때에도 물 고인 데가 없었는데. 아침까지 왔던 비가 소화가 덜 된 곳이 있었던 것이다. 운동화는 흙탕물 마사지를 받았고 그새 잠이 쏟아지는 둘째는 울기 시작했다.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기 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호흡이고 뭐고 변명하듯,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상황을 읊었다. “아이고, 졸려? 응 맞아~ 우리 이제 집에 갈 거지? 엄마랑 집에 갈 거지?” 누가 왜 아기를 울리며 이러고 있냐고 질책할 것만 같아 자꾸만 장황하게 말하며 달랬다.
길을 살피며 빨리 걷다가 다시 뽀송한 길이 펼쳐지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달렸다. 둘째는 금방 깰 것이 분명하지만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이때다 싶어 메가커피로 향했다. 커피를 서로 주려고 하는 방*에서 받은 커피쿠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날씨 눈치를 봐가며 오늘의 운동을 실천한 나에게 선물을 하듯 커피를 마셔주기로 했다. 시원한 커피를 받아 들고 작가님 말씀처럼 글을 써야지 생각하며 집에 도착하니 잠잔 지 고작 20분 만에 둘째가 깼다. 살짝 달래며 서둘러 씻고 나오니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또 비가 오다 살짝 멈추면 엉망이 되었던 신발은 잊은 채 또 달리러 나갈 것 같다.
*커피를 서로 주려고 하는 방 관련글
https://brunch.co.kr/@affair2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