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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Dec 12. 2023

청소기를 버려야 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를 처음 만난 건 2018년 2월이었다. 그는 운명처럼 우리에게 왔다. 복직을 앞두고 첫째를 데리고 첫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쇼핑왕인 남편이 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하였고, 기대는 커녕 응모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당첨 소식을 전해들었다.



우리 다이슨 당첨됐어!




그렇다. 그는 다이슨 청소기였다. 당시 쓰고 있던 다이슨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침 유선청소기가 고장났다고 하는 어머님께 드리고(효도인가 불효인가) 새 제품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만난 V8. 당시에는 무선 청소기 하면 일렉트로룩스나 다이슨과 같은 해외 브랜드만 있었고 그중 다이슨을 최고봉으로 쳐줬다. 어쩌다보니 두 제품 다 쓰고 있었는데 일렉트로룩스보다 다이슨이 가볍고 주둥이도 상황에 따라 바꿔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차에 새 다이슨이라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햇수로 6년째(몇 달만 더 있으면 만으로 6년) 함께하다보니 그도 늙었나보다. 어느날부터 빌빌 거리는 것이 힘이 없게 느껴진다 했다. 분명 청소를 했는데 흡입이 전혀 되어 있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만, 그러고보니 전동헤드가 돌아가질 않는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본체와 헤드를 연결하는 곳이 터져서 바람이 새는 것 같다고 분석을 했다. 내가 깨먹은 사이드미러도 구입해다 뚝딱 바꿔주는 능력자 남편은 당장 부품을 사서 바꿔끼웠고 청소기는 흡입력을 되찾은 듯 했다.



안심하고 사용하던 어느 날, 이번엔 작동 시간이 너무 짧다. 배터리 충전이 덜 되었나. 원래 이정도로 짧았나. 하긴 V8을 만났을 즈음부터 국내 브랜드에서도 내로라할 성능의 무선청소기들이 나왔고, 상대적으로 늦게 결혼한 친구들의 집에 가면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는데 다들 배터리가 훨씬 오래가고 배터리 개수가 두 개인 경우도 있어 하나는 사용하고 하나는 충전하면 되는 신문물이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우산이 구멍이 나 비가 새도 줄줄 흐르지 않으면 헌 우산을 버리지도 새 우산을 사지도 못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집 한바퀴 돌리는 데 문제 없으니 우리 이슨씨(홍현희님의 이슨씨 아님 주의)와 헤어질 수 없지. 배터리 사용 시간이 짧아진거면 충전을 자주 하면 되지. 짧게 짧게 청소하면 되지. 다른 도구로 청소하고 필요할 때만 쓰면 되지.



...되긴 뭐가 돼?



짜증이 솟구쳤다. 가뜩이나 귀찮은 청소. 청소기라도 죽죽 밀고나가면서 집이 깨끗해지는 걸 보면 속이라도 시원할텐데, 청소기 기분맞춰가며 눈치보며 사용해야 한다니. 다시 보니 이 녀석(더 이상 '그'가 아니다), 충전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어어 하다보니 1분도 채 버티지 못한다. 청소기를 버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래 쓰긴 썼지. 그런데 지금 돈이 없다고. 아직은 가면 안 된다고. 아니, 밥통도 치웠으니(06화 전기밥솥을 버렸다 (brunch.co.kr)) 청소기도 치우고 걸레질을 해볼까. 아니야, 그러다 먼지구덩이에 살게 될거야. 살림을 편하고 간소하게 하려고 비우는건데 청소기가 없으면 스트레스를 더 받을지도 몰라. 오히려 지금이 기회인 것 같기도 해. 청소기가 수백만원 하는 것도 아니니 사려면 살 수 있긴 하잖아. 머릿 속에서는 수백가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 모르겠다.


돌아오면 새 청소기가 와 있을 수도 있어.



들려오는 마음 속 잡음에 억지로 귀를 막고 필리핀으로 튄 나에게(주의. 빈대출몰 (brunch.co.kr)) 역시 믿음직한 쇼핑왕이 말했다. 이번엔 내가 요청한거나 다름없으니 그대의 쇼핑력을 기대해보겠노라. 가성비 좋은 청소기를 기대하겠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간 필리핀, 친구네 집에서 다이슨 V15를 만났다. 와, 미친 흡입력. 게다가 7박 8일동안 한번의 충전으로 모든 곳을 청소할 수 있는 정도의 배터리 유지력(에코모드로 썼다). 너무 갖고 싶은 그였다. 남편이 이 분을 모셔놓는 건 아닐까? 남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1990년대 말, 초딩들 사이에서는 또각또각 소리나는 유리구두(굽있는 슬리퍼)가 유행이었다. 금색이나 은색에다가 술까지 달려있어 화려함의 끝을 찍던 그 신발을 갖고 싶던 나에게 엄마는 '2002'라고 쓰여진 분홍색 고무 슬리퍼를 사주고는 산지 얼마 안 된 새 슬리퍼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이게 떨어지면 사주겠노라 하였다. 2개의 0에는 각각 축구공 모양과 태극기 모양이 그려져있었던 2002 슬리퍼는 사실 은근히 푹신푹신한 것이 발은 편했는데 영 촌스럽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걸 무찔러야만 유리구두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파트 현관 계단에 쭈구려 앉아 슬리퍼를 들고 바닥에 긁었다. 아니 슬리퍼를 바닥에 대고 갈았다. 지금의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서도. 슬리퍼를 갉아 망가뜨린 후, 새 물건을 사야하고 그것이 유리구두여야만 하는 열 한 가지 이유를 A4용지에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렇게 유리구두를 얻었다.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기 위해 가지고 있던 멀쩡한 물건을 망가뜨리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인가. 흔한 소비 이유가 되는 ‘유행’은 정말 소비의 이유로 적합한가. 집을 비우며 확인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다. 혹자는 말한다. 물건이 많을수록 개별 물건의 값어치는 떨어진다고. 그렇다. 너무 많으면 소중한지 알 수가 없다. 너무 흔하면 어디다 둔지 모르고 오히려 필요할 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또 사고 또 반복한다. 그건 물건을 사용하는 삶이 아니다. 물건의 주인으로서 사는 삶이 아니다.



한창 핸드폰이 보급되던 시기,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도 휴대폰이 생겼다. 40화음 흑백 전화였다. 아직 핸드폰이 없는 친구들과 16화음 핸드폰을 쓰던 친구들은 내 핸드폰 좀 보자며 달려들었다. 볼 것도 없는 핸드폰에 담긴 벨소리를 들어대며 황홀경에 빠졌다. 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마냥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건 나에 대한 환호였을까, 핸드폰에 대한 환호였을까. 물건의 주인으로서 함께 환호성을 받는 느낌이었으나 과연 그럴만한 것이었을까. 최신 기기를 소유한다고 해서 소유권을 갖고 있는 자의 가치가 올라가는가. 그 대단한 핸드폰을 고3까지 사용했다. 친구들의 핸드폰은 64화음을 넘어섰고 컬러는 당연, 카메라까지 달리는 동안 내 핸드폰은 그대로 흑백에 40화음이었다. 그렇다면 내 가치는 그만큼 하락한 것인가. 그런 물건을 사용하는 나는 뒤처진 사람인 것인가. 동일시한다면, 나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소비를 해야만 하는데 눈깜짝할 새에 새로 출시되는 최신 기기를 다 구입할 수는 없다. 소비를 위해 사는 삶보다는 필요한 것만 소비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능력 좋은 새 친구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며 돌아온 집에서 난 V8을 다시 만났다. 아무래도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았나보다. 식사를 제대로 못했는지 1분도 못버티고 꺼지는 청소기놈. 갖다 버릴까 싶다가 배터리 문제일지 모르니 배터리를 갈아보자 마음먹었다. 얼마전에도 갈긴 했기에 이젠 배터리 문제가 아니라 노환이 문제일거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엘지가 야구 우승 기념으로 할인한다길래 달겨들었으나 늦어버려 새 청소기 구입을 못하였으니 일단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배터명색이 맥시멀리스트이면서도 미니멀리즘을 실천코자 하는 사람으로서 일단은 어떻게든 심폐소생하여 더 오래 써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는 다 명분이고 실은 돈을 아껴보려고 배터리를 샀다. 제발, 배터리 고장이어라, 이중지출이 되지 않기 위해.








그랬더니 이 녀석! 아니 이 분, 다시 힘을 낸다. 잘 움직인다. 고마워요 V8. 아직은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조금 더 오래 함께 하자 그 말입니다. 괜찮은 것을 오래 쓰는 것, 쓸 수 있는 것이 오래되었다고 버리고 새것을 쉽게 사지 않는 것, 살 때 많이 고민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을 해나가며 살고싶다. 물건의 주인으로, 물건에 감사하며 그야말로 자알-사용하며 살고 싶다. 오래된 청소기를 쓰더라도 청소만 잘 되면 된다는, 본질을 잊지 않으며 말이다. 힘을 내요 V8, 당신 참 괜찮은 청소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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