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우리 숲이야기 공모 수상작
아침 일과를 마무리하고 늘 그랬듯이 산책에 나선다. 가을을 맞은 산책길에 하나둘 낙엽이 쌓이기 시작했다. 부산하게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선보이던 시기를 지나 잠시 휴식기에 접어드는 시간. 져야할 때를 아는 노랗고 붉은 낙엽을 보고 있으면 화사한 꽃과는 다른 내적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하염없이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바람결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면 와아- 하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제 겨울이 되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지고 벌거벗은 나목(裸木)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춥고 모진 겨울을 견딘다. 사람도 그렇게 심지만 남고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무에게 부러운 부분이다. 이제 50살이 지나고 보니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리석었는지. 다음 생은 그런 후회를 갖지 않도록 기록이라도 남겨야 할까보다. 봄이 되면 새 잎사귀가 나고 나이테가 굵어지며 자신의 성장을 기록해 나가는, 어쩌면 나무야 말로 완벽한 환생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든 젊은 날은 오로지 빌딩숲에서 보냈다. 주말도 없이 일하던 그 시절에는 무조건 내 일에 있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우울증이라는 병을 얻어 오래도록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고사(枯死)위기에 처한 것이다.
내가 치유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이다. 생협에 근무하는 시누이의 소개로 숲 공동육아를 해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북한산 둘레길, 서대문에 있는 안산 자락길, 은평에 있는 이말산과 앵봉산, 종로에 있는 삼청공원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산후우울증이 심했던 나는 사실 아이를 데리고 산에 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육아라는 같은 애환을 가진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자연에서 뛰어노는 것을 보며 숲의 공기를 마시자 자연이 주는 생명력에 매료되고 말았다.
자주 가는 북한산에는 참나무가 많다. 참나무는 곤충과 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다. 온갖 생물들이 모여 산다. 가을이면 도토리도 많고 그걸 먹이로 삼는 청솔모나 다람쥐도 많다. 딱따구리가 남기고 떠난 구멍을 보는 것도 재밌다. 어디선가 새로 집을 짓는 딱따구리의 소리가 나면 엄마와 아이들 모두 귀를 기울인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면 산바람이 불어오면서 솨아아하는 폭포 소리가 났다. 발밑에는 겹겹이 쌓인 낙엽 덕분에 푹신한 쿠션 위를 걷는 기분이다. 우리는 텃밭도 가꾸었다. 상추, 고추, 딸기, 감자 등을 심어 물도 주고 잡초를 뽑아 주며 잘 자라기를 바랐다. 수확의 시기가 오면 시장에서 파는 것과 맛부터 달랐다. 금방 딴 상추와 밥을 먹고 나서 엄마들과 공기놀이도 하고 림보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도 이런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숲에서는 통증도 우울도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와 숲이 없었다면 나는 우울의 한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나의 생명을 살린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숲에 다닌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사정이 있어 우리 가족은 안양으로 이사를 왔다. 숲 공동육아도 끝이 나고 아이는 벌써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나는 집 근처 안양천을 산책하는 게 하나의 낙이 되었다. 이제 가을이 되니 강둑을 따라 심어진 나무들의 나뭇잎이 색색깔로 떨어질 채비를 하고 있다. 여러 차례 찾아왔던 태풍을 꿋꿋이 이겨내고 한 여름 그늘을 만들어 주던 나무들이다. 유난히 뽕나무가 많아 새콤달콤한 오디를 맛보았던 지난 여름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얼마 전, 아티스트북 전시회라는 것을 보았는데 아주 화려하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아티스트북들이 많았지만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모습이 모두 떠나간 홀로된 모습 같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지니고 있던 해묵은 감정이나 나쁜 기억은 털어 버려야 할 것이다. 이제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늘어가는 흰머리와 주름이 나이테처럼 나에게 새겨진다. 이것이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계절을 준비해야 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나에게 나목(裸木) 이 되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거스를 수 없고 우울한 일일 수 있지만 자연은 내게 가르쳐준다. 노랗고 붉은 잎사귀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분명 새롭고 아름다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은 나를 잉태한 존재이자 나이듦의 의미와 내가 가야할 길을 일러주는 스승이다. 생명이 다한 것처럼 보이는 나목(裸木)이지만 그 안에 몇 번이고 새로 태어날 잎사귀와 꽃과 열매가 있다. 자연의 신비와 경이가 멀리 있지 않고 나무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