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동서문학상 수상작
비취색 하늘이 펼쳐진 가을아침,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가족들은 모두 나가고 오롯이 혼자 있는 고독한 시간. 내 안에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친다. 외로움, 우울, 불안 같은 바람에 그대로 내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로 마음을 다잡아 본다.
“호수에서 큰 소리로 웃어 대는 물새나 월든 호수 자체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 롭지 않다. 초원에 홀로 피어 있는 노란 현삼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말파리,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그는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힘주어 이야기했지만 나는 반대로 외롭지 않은 존재는 없다라고 들린다. 겉보기에 자연은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보도블록 틈 사이로 난 민들레를 보고 외롭겠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외로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은 혼자 지낼 수 없다. 자연철학자였던 소로우 역시 월든에서 산 기간이 2년 정도라고 한다.
사실 나의 외로움은 내가 자초한 것이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한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 때문에 만나게 된 엄마들이 모여 다닐 때도 차 한 잔 정도는 하지만 그 이상 함께하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입 속에서 맴도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삼키기 일 수다. 그렇게 나는 고독과 친구가 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늘 다투셨고 나는 그런 사실을 누가 알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불화하시던 부모님 두 분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는 우주의 미아가 된 것 같은 절대고독을 느꼈다. 내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털어놓을 데가 없다는 것이 마치 소리를 낼 수 없는 나팔꽃이 된 기분이었다.
오십이 된 지금까지도 예기치 않을 때에 바람이 사방으로 불어온다. 어디로도 도망칠 곳이 없다. 온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내 안의 바람은 나를 생각의 바다로 이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 받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견디기 힘들만큼 버거우면 가까운 안양천으로 산책을 나간다. 봄에는 노란 개나리와 연보라색 제비꽂이 쏟아질 듯이 피어있다. 그 위로 두 팔 벌려 몸을 날려보고 싶어진다.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어주는 울창한 느티나무와 뽕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바람이 귀해도 나는 가을바람이 좋다. 선선한 바람이 나를 설레게 한다. 뜻밖의 인연이라도 만나게 될 것 같다. 사시사철 나무는 늘 있던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고 백로와 청둥오리는 한가로이 먹이를 잡는다. 커다란 잉어떼의 힘찬 물질은 강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산책길 내내 평화로운 자연과 함께 하다보면 내가 어떤 기분일지라도 나를 온전히 받아주고 위로해 준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만큼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오늘도 네가 왔구나. 잘 살고 있는 거지? 힘이 든다면 내게 기대어봐. 나는 언제 나 네 곁에 있어. 언제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산책을 하다보면 내 안의 바람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몰라도 언젠가 또 찾아올 것이란 걸 안다. 그 바람은 때로 나의 항해를 돕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신혼 초, 행여 나의 결혼이 부모님 때처럼 어긋나게 될까봐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다행히 남편은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배려하는 마음과 따스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려고 노력했고 결혼이 무엇인지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가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좋은 부모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빌려 읽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는 나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무관심이 상처가 되었기에 나는 아이에게 집중하려고 애썼다. 아이는 늘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아이 때문에 화가 난 적이 없을 정도로 순하고 귀여웠다.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었지만 숲공동육아를 하며 자연에서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하는 엄마들과도 잘 지내려고 내성적인 나의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세상이 재밌고 멋진 곳이라고 생각되도록 산으로 바다로 도서관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그 중 자연은 엄마의 품처럼 우리를 품어 주었다.
내 안의 바람은 돛단배 같은 내가 방향키만 잘 잡으면 상상하지 못했던 빛나는 곳에 닿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했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여전히 두려움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젠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넌 안전해. 그리고 너는 이제 이겨낼 힘이 있어.“라고.
현자들의 말 중 가슴에 남았던 말은 과거나 미래 말고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여전히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휘돌아 지나갈 뿐이다. 자연은 내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연은 늘 나에게 해답을 알려준다. 태풍과 장마, 가뭄과 눈,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내는 자연을 보면 그 자체로 인내와 지혜의 샘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처 하나 없는 멋진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 바람결에 흔들리지만 대추 한 알, 사과 한 개처럼 세상 모든 것은 흔들리면서 더 단단해 진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태풍이 와도 바람에 뽑히지 않을 수 있게 바람과 함께 춤 출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