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신가요
이따금 유명 건축가들의 결과물을 보면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적지 않다.
건축이라는 학문을 배우면서 최초에 들었던 어떤 기본적인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보통의 건축 사용자들에게는 불편하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구조와 형태들이,
온전히 인정받고 오히려 칭송을 받을 지경까지 이르고 보면 이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건축이란 말인가 싶을 정도도 없지 않다.
누군가 너는 뭘 얼마나 잘하기에…….라고 역공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만큼 유명한 건물을 설계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아름다운 건축물도 현대건축에서는 ‘보편성’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게 내 주장이다.
무엇인가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작품’을 완성할 수 없다는 이유라면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과감하게 ‘비겁함’이라 부르겠다.
일전에 어느 건축사무소에서 고급빌라를 설계한 결과물을 본 적이 있다.
수입 자재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비싸고 절차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 빌라는 아낌없이 모든 마감재를 수입품으로 썼다.
철근과 콘크리트와 시멘트 외 모든 자재는 전부 수입품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수입재'로 건축을 한다는 건 보통 건물의 두세 배가 넘는 건축비가 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평면도 세대당으로 따져보면 무척 넓어서 그 당시에는 아마도 서울 시내 최고로 넓은 평수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세탁기를 놓을 자리가 없었다.
각 방의 동선과 중첩을 고민하다 보니 정작 흔하디 흔한 다용도실 하나 없었던 것.
게다가 현관에 짜 맞춰진 신발장을 열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빼곡한 선반들이 적어도 이백 켤레 이상의 신발을 넣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문제는, 선반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라 조금 높은 앵클부츠 정도도 들어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우산이나, 현관에 흔히 놓이곤 하는 잡다한 물건들은 놓을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방의 숫자가 많았지만 그 방에 침대를 하나 놓으면 더 이상의 공간이 부족했다.
누구든 그 집에 입주하면 더는 다른 가구를 살수도 놓을 수도 없을 만큼.
붙박이 장이 있었지만 붙박이장의 문을 여닫이로 만들면 침대에 걸려 열릴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아서,
슬라이딩 미닫이로 문을 만들어 달았다.
방의 숫자는 많았다.
그 방이 대개 흥부네 집처럼 누우면 발이 벽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좁았지만.
오랜 기간을 들여 수입한 '이태리 제' 컬러풀한 승강기는 비좁아서 여섯 명이 타기에도 버거웠고,
계단실은 드높고 넓어서 멋졌다.
계단실의 채광창은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교회처럼 정사각형의 깊은 창이 색색으로 뚫려서 예뻤다.
대신 자연채광이 들어오기 어려울 정도로 벽이 두껍고 깊어서 어두웠다.
대체 왜 이런 황당한 주택이 생긴 것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고 추론일 뿐이지만 내 생각에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당시 그 설계를 주도했던 사람 몇몇은 이력만 놓고 본다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 서러울 만큼 유명한 대학의 전공자에 유명한 설계사무소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수만 장에 이르는 도면을 그리고 보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공부에 빠지고 연구에 빠지고 일에 매진하다 보니 늘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꼭두새벽 이거나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었다.
정작 자신의 집에 필요한 물건이 무엇이며 주방에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르 코르뷔지에 나 미스 반 데어 로에 나 바우하우스를 거의 신처럼 받들었다.
그러나 국내 여건상 그들이 해외 연수를 통해 볼 수 있는 거장들의 건축도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고 그들이 접했던 것들은 대개 건축의 ‘외피’에 속했다.
거의 세탁실을 써본 적도 없고 주방에서 요리를 해본 적도 없으며 '가정집' 안에서 직접 뭔가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설계한 '가정집'.
이미 삼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당시 드물게 건축관계자들을 초빙하여 오픈 기념식을 할 때,
유명 대기업 현장소장이 내게 다가와 ' 이런 집은 앞으로 짓지 말라고 좀 하세요 '라고 말을 했었을까.
외피에 치중한 주택.
겉보기가 제아무리 좋아도 사는 거주자의 편의가 거의 고려되지 않은 결과물들이 나왔다.
오히려 그들은 거주자들의 불평에 대하여, 건축에 무지하여 그렇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그럼 거주자들이 건축을 배워서 그 공간이 얼마나 심오한 철학으로 이루어졌는지 이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건축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할만한 그들은 실제의 '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아마추어였던 거다.
그들은 전무후무한 ‘걸작’을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
물론 그 ‘과정’은 그랬다.
그들은 치열하게 매일 새벽을 밝혀가며 작업을 했고, 난상토론을 했었다.
건물의 준공 직전까지도 무수한 토론과 스터디를 했다.
하지만 거기에 ‘생활자’로서 의 시각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들은 창의 위치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채광의 다양성을 논했다.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벽체의 색상과 계단 통로를 통해 비치는 단조로운 자연광의 리듬을 이야기했다.
비좁은 통로를 집안 여기저기 배치하여 새로운 공간들이 나타나는 것에 스스로 경탄했다.
게다가 이 정도의 기술을 실현할 수 있는 건설사는 자신들밖에 없다는 자아도취를 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아무도 김장할 공간이 어디일지,
빨래는 어디에 널어야 좋을지,
겨울철에 눈이 묻은 채 들어온 현관에서 신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주방에 쌓인 쓰레기를 어느 곳에 놓아두어야 벌레가 끼지 않을지 따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계획한 방들은 마치,
르 코르뷔지에의 라 투레트 La Tourette 수도원 수사들의 방만큼이나 작고 소박했다.
창문도 작았다.
그곳에서 살게 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들이 수입하여 설치한 중앙집중식 청소기 시스템은 거주자가 방방마다 커다란 청소기 막대에 연결된 튜브를 질질 끌고 다니며 청소 소켓에 꽂아야 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장비였다.
모든 방에 청소기용 배관 플러그가 있고, 그 플러그에 호스를 꽂으면 강력한 흡입이 되면서 쓰레기들이 배관을 타고 이동해서 지하층의 처리 탱크로 모이는 구조였다.
집주인은 단순한 진공청소기보다 효율적이며 건강에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매일 배관공처럼 튜브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자신에게 짜증이 날만한 구조.
그 이후로 그런 류의 시스템이 어느 건물에도 적용되지 않는 걸 보면 실제 가용성은 나빴던 모양이다.
베란다 공간이 없는 방들은 외기에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비가 들이치게 될 상태였다.
오래전 르 코르뷔지에가 빌라 사부아에서 겪은 시행착오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들이 설계하고 지은 집은 마치 갤러리 같았다.
아무런 생활 가구 나 삶이 없이,
비워진 하얀 벽에 그림을 걸고 드문드문 조형물을 놓으면 딱 사진 찍기에 좋았다.
그 당시 시대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미니멀한,
요즘 유행하는 인테리어의 시초와 같았다.
그것뿐이었다.
집주인은 침대에서 일어서자마자 불과 한 걸음도 안 될 거리에서 코앞에 서 있는 붙박이장의 거울에 아침마다 소스라칠 터였다.
아내와 함께 일어나 한 명이 화장실을 들어가려면 한 사람은 도로 침대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로.
그 집은 당시 서울의 아파트들과 비교해도 높은 가격으로 분양을 시작했고,
당연한 결과로 한 채도 팔리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그 건물을 설계하고 시공한 회사의 사장님과 친인척 분들이 입주했다고 전해 들었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건축에 대해 신물이 날 정도로 배운 것도 모자라 밤 새 난상토론을 거듭한 결과물이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