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집안의 장남이셨던 시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명절 제사를 지내지 않을 테니 자유롭게 연휴를 보내라고 선언하셨다.
나는 차례나 제사 때 특별히 많은 일을 하진 않았지만, 제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일종의 며느리 업무 같은 느낌이었다. 남편이 일반 직장인이 아니기 때문에 명절이나 휴일이라고 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요일에만 쉬었다. 주 4일로 전환한 것은 올해부터 이기 때문에 그전에는 다른 직장인에 비해 연차가 한 참 적었다. 나 역시 매일 근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 한 만큼 버는 일이기 때문에 가족 행사 때마다 상담을 쉴 수 없었다. 그래서 정해진 휴일이 아니면 제사 음식을 함께 하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잘해야 명절에 다른 직원들과 휴일 조정이 잘 되면 오후에 부부 2인조가 부침개를 부치는 정도였다.
제사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이다. 그게 누구든 사랑하는 이라면 살아있을 때 잘하자는 생각이다. 종교가 없는 나는 전생도 내세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 지금이 있을 뿐이다. 제사는 일종의 사회적 종교행위라고 생각한다. 다른 종교와 같이 존중은 하지만 나의 종교는 아니다. 다만,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잘 먹지 않는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만들고 결국은 음식물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귀결에 매번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시부모님의 제사에 대한 생각은 진심이셔서 굳이 어른들의 믿음을 과학적으로 논쟁하고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시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성의를 넘어선 희생을 강요했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할 만큼 하는 노력에 비난이 없으셨다. 그래도 장남인 남편에게 요구한 작은 의무가 제사와 차례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설날과 추석 당일에는 언제나 시댁에 있고, 그 앞 뒤로 우리 집에 가게 되었다. 의례 그렇게 되어 엄마도 그에 대해 크게 서운해하지는 않으셨다. 내가 워낙 시댁에서 하는 노동의 양이 적고, 체류하는 시간이 길지 않다 보니 당일 이벤트 참석에도 큰 불만은 없었다.
집안의 대장이 되신 어머니가 명절 제사를 없애고 처음 맞는 추석이 왔고, 나는 어머님 지침대로 자유롭게 이번 추석은 친정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다. 남편이 추석 전날까지 일하기 때문에 나는 아들과 먼저 고속버스를 타고 친정이 있는 주문진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참여하던 명절 행사가 갑자기 없어지니 정말 그대로 해도 되는지 아닌지 우물쭈물하게 되었다. 약간 고3 기말고사 같은 느낌이었다. 시험이니 공부를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대학입학 성적에 들어가지 않으니 의무는 아닌 애매한 시험.
의무는 아닌데 지켜야 할까?
몇 주 전 버스표를 예매하기 전에 남편에게 말해 어머님의 의중을 살짝 떠봤다. 남편은 아주 쿨하게 "엄마가 우리 편한 대로 하래. 안 와도 된대."라고 했다. 안 와도 된다는 것이 정말 안 와도 된다는 것인지 이것들이 정말 안 오는지 두고 보자는 것인지에 있어 나는 후자였는데 남편은 전자라고 장담했다. 심적으로는 분명 후자가 답인데, 그래도 직계 1촌인 남편의 해석을 믿기로 했다. 나는 버스표를 샀고, 우리는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추석 다음날 시댁에 가기로 했다. 후에, 어머니가 아주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신 것을 보면, 장담컨대 남편의 장담은 오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엄마네 집 식탁에 앉아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들으면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제 밤늦게 짜구를 데리고 집에 도착한 남편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점심에는 단호박 수프에 프랜치 토스트와 치즈를 먹었고 저녁에는 새우와 고기를 구워 맥주를 마실 생각에 신이 났다. 추석이 의무가 아니라 즐거운 휴가로 느껴진다.
내가 전처럼 명절 당일에 시댁에 존재하는 것을 의무처럼 지킨다면 그건 모두에게 행복일까?
내가 매번 제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의 손발이 되었다면 그건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머니는 며느리들이 도움이 되지 않으니 힘든 차례상을 더는 차리고 싶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도 저 지경인데 돌아가시면 어차피 안 지낼 거 미리 관두자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또, 내가 확실히 명절의 의무를 놓으므로 해서 반신반의하던 어머님도 확실히 장남 며느리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처음에는 좀 어색하고 죄책감을 가질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명절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다소 갈등이 될 수 있는 일도 장기적으로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들이 있다. 부디 지금도 그런 경우이기를 바란다! ^^ 내일은 주문진수산시장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마른 오징어를 사가지고 가야겠다!
화요일의 감사
- 화통하게 명절 차례를 없애주신 시어머니에게 감사합니다.
- 조금 남아있던 나의 며느리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훌훌 벗겨준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 명절에 놀러 온 딸에게 맛난 음식을 해주신 엄마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