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귀가 아니면 더 행복해?
11월의 폭설로 서울경기권 일대가 눈에 잠긴 날, 나는 이전에 썼던 단편을 개발새발 고쳐서 눈길을 해치며 우체국에 갔다. 금요일에 가도 되는데 굳이 목요일 오후 5시 30분에 간 것은 하루도 더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공부는 안 했지만 시험은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망해도 시험 쨀 수는 없잖아? 이런 생각.
마음이 그렇게 편하다. 심지어 어제 우편도착 톡이 와서 택배인가? 하고 눌러볼 정도였다. (신춘문예는 대부분 우편접수다.) 이래서 공부를 안 한 친구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는 거다. 공부 안 해서 시험 망쳤는데 불평하고 억울할 것도 없다. 분노도 실망도 노력을 했을 때 오는 것이 마땅하니 말이다. 노력했는데 안되면 기분이 그지 같다. 난 그 실망과 자괴감에 빠지고 싶지 않은가 보다. 단기적으로 스트레스가 적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장이 없는 선택이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성장을 그렇게 하고 호랑이도 아닌데 값진 가죽을 남길 거라고 발버둥인가 생각하니 낮잠이 솔솔 온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남편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뭐가 그렇게 되려고 해?'
아무것도 안 하면 내가 짜구냐?
짜구는 아무것도 안 해도 행복한데 나는 개가 아니다. 코알라처럼 많이 자면 행복한 남편도 아니다. 나는 바다를 누비는 상어고 목표물이 있으면 이빨을 드러내고 돌진하는 포식자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먼바다는 못 가고 항구가에서 얼쩡이며 배만 잔뜩 부풀린 복어였다. 남편의 위로에도 삐뚤어진 나는 퉁퉁 거린다.
우체국에 갔다 온 날, 저녁에 '텐트 밖은 유럽'을 보는데 이탈리아가 너무 좋아 보였다. 이탈리아의 알프스라는 돌로미티에 간 연예인들이 나오는데 부러웠다. 급진적으로 이탈리아 여행 검색을 하다 금요일에 패키지 상품을 계약했다. 남편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냐며 통장을 까라고 시비를 털었지만 못 들은 척... 비용과 시간을 고려하다 보니, 돌로미티가 멋져서 시작한 이탈리아 여행 계획에 돌로미티는 빠져있었다. 나 분명 TJ인데... (패키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출동한다는 블로그를 보고 월요일에 캔슬했다. ㅠㅠ)
일요일에는 아침에 그간 고친 단편들에 대한 리뷰 모임이 있었다. 아.. 발꾸락으로 쓴 것 같은 글을 들고 아침부터 출동을 하려니 몸이 공벌레처럼 말린다. 중력이 우리 집에서 시작하는지 밖으로 가면 자꾸 발걸음이 느려진다. 궁여지책으로 중력의 일부를 가진 남편을 잠옷 채 끌고 집을 나섰다. 일찍부터 나간다니 짜구만 신이 났다. 입구에서 남편과 짜구를 돌려보내고 나 혼자 총총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살짝 보니 남편이 째려보는 것 같다.)
주말 아침인데도 부지런히 나온 스터디 멤버들과 각자의 글을 리뷰했다. 나는 자매 관계에서 생기는 집착과 질투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글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의 편협함이 보인다는 코멘트가 나를 훅 쳤다. 편협함이란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그 단어가 딱 맞다. 나의 세계는 언제든 도움을 청할 곳이 있는 안전한 우물 안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나는 소설보다 예능인가? 미니시리즈보다는 시트콤 쪽인가 보다. 그럼 내 글의 색은, 방향성은 어디에 둬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보니 갈 시간이다.
소설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 넷플릭스에서 Mr. 플랑크톤을 정주행 하는데 너무 재밌어서 기부니가 또 좋아지고 말았다. 단국대 후배 도환이는 왜 이렇게 멋있니. 주인공 해조(우도환)가 갈 곳 잃은 재미(이유미)에게 말한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달리다가 길을 잃으면 그건 방황이야.
그런데 목적지 없이 떠돌다가 길을 잃으면 그건 방랑이야.
그러니 같이 방랑하자고. '해조야, 아녀~ 그냥 너처럼 짱 멋진 남친이 없어서 방황하는 거여.' 10회를 1.25배속으로 8시간 탈탈 털어 보고 나니 해가 졌다. 해조와 헤어지는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드라마를 보니 배경촬영지인 완주가 또 그렇게 좋아 보인다.
그렇게 한 주를 보냈다.
바람 부는 날 비닐봉지처럼 방향도 없이 흩날렸다.
덤보의 귀를 하고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불안도 많고 책임감도 높고 엉덩이도 무거운 내가 팔랑귀마저 아니었다면 그건 또 괜찮냐고.
우물 안 바위처럼 이끼만 잔뜩 껴있으면 행복하냐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화요일의 감사
- 덤보처럼 팔랑거리는 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많아 중력을 거슬러 날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