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왜 하세요? (1)

생계유지형 : 남의 돈 벌어 먹고살기

by orosi

풋내나는 나이에도 오래도록 필터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어린시절 내내 지독히도 생계형 알바에 자유롭던 탓에 가급적 결박되어 있는 느낌의 직업을 동경하게 된 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뭣하러.

학생이 무슨.

공부나할 것 이지.

걱정마라.

등의 멘트를 기대해 본 적도 있진 않았을까?글쎄.


중학생의 신분으로는 전단지 알바 정도가 전부였을까. 용돈벌이나 됐는지 모르겠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는 기억에 없고,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해결하도록 이미 압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 누구도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려준 사람은 없었지만 달리 부아가 돋거나 마음에 옹이가 질 이유도 없었다. 지금 20대 싱그러운 대학생들을 보면 애달픈 과거지만, 그때의 내겐 그저 새들한 일이었다. 달리 못할 이유가 없어서 했다기 보단 마땅히 산 삶이다.


캐리비안베이에서 딱 한 번.
수상구조요원?


딱... 한 번?



그렇게 살기도 하는구나. 취미삼아 알바를 하는 사람들도 그때의 난 무쟈게 힘들었노라.하더라.

남편은 그렇게 본인이 좋아하는 수영을 떠올리며 그마저도 마뜩잖아 하며 한 달 겨우 버텼다고 했다. 종종 세상 사람 같다.




경포의 유명 라이브 카페(시작은 우리집 대들보 막내삼촌의 사업장)에서 시작된 전투알바.

요즘으로 치면 어디가서 돈 주고 배울 기술들을 섭렵하기에 바다를 낀 관광지는 꽤 적절했다.

난생 처음 칵테일을 만들어 보고, 각종 안주를 멋드러지게 셋팅하고, 김치볶음밥부터 돈가스까지 잡다한 묘기를 익혔다.

'피나콜라다'라는 칵테일을 멋이 아닌. 하필 혼을 담아 즐기던 중년 남성에게 쌍욕을 얻어 먹어도 보았다. 매출에도 기여하면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내 놓곤 했던 '예쁘기도 하지' 과일 안주를 굳이 나를 불러 세워 뒤집어 엎어버리는 손님도 있었다. 양파를 자르던 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과에서 이런 맛이 날 수 있냐며 당장이라도 내 머리채를 잡아 흔들 기세였다.


빙고!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양파를 썬 칼이 맞다. 고객님 쏘리 & 삼촌 미안..

나의 어수선함에도 카페 운영이 곧 잘 되었던 게 몹시 의아하다. 그의 사업이 여전히 건재한 기밀은 따로 있으리라 본다.







목적 하나. 생계유지


대학입학과 동시에 한 학기 단위로 나의 생계는 다름 아닌 '내게' 달려 있었다. 어떠한 일자리를 마주하고도 떨떠름해 할 이유가 없었다.


고정알바로 월.수.금은 학교후문 베스킨라빈스에서 일했다. 재미도 있었고 맛도 있었다^^ (여기까지)


금요일은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 많아 기숙사 점호가 없어서 한 시간 더 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목 이틀은 고 3을 앞둔 치킨집 딸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족히 1시간 10분은 걸어야 도착이고, 페이만 보고 대상을 선택하던 때라 거리는 괘념치 않았다. 오직 액수.

이때 오며 가며 나의 평생 체력이 길러졌다고 본다.

그땐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손에 우리말 또는 영어로만 세로로 빼곡이 채워진 단어장을 7장씩 찢어서 대충 테이프로 고정.

가는 길, 오는 길 시끄럽게 중얼대며 내 시간을 채웠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공부 효율이 오를 줄 모르는 금지옥엽 외동 딸을 바라보며 치킨이 튀겨지는지. 마음이 튀겨지는지.

그저 애가 타는 두 분은 유독 나를 챙겨 주셨다. 본의 아니게 기숙사 나머지 셋 멤버가 목요일 밤이면 내가 오기만을?치킨이 오기만을 목 빠져라~~ 기다렸었다.






주말은 제법 다양하다. 강릉에 내려가는 주말이면 주말알바라는 이유로 수당이 덧붙는 횟집, 순두부집 가릴 것 없다. 하루 8만원. 그 당시치곤 꽤 쎈 일당이다. 지금하래도 할 법한?


방학이면 각종 영어캠프에서 원어민 팀티칭이나 교사 관리 헤드티처 자리는 주별로 뛸 수 있었고,

그렇게 나의 통장에는 생계를 위한 채비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두 번째 학기부터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런 저런 러브콜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 금수저이자 유흥을 즐기느라 바쁜 대학생들이 손수 나를 고용했다. 그 돈은 다 어디서 나는지.

전공원서는 거들떠 보기도 싫은데 과제나 시험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고객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다양한 전공서를 섭렵하고 가계에 보탬이 되도록 살았다.

가장 오래도록 도왔던 건 청각학과, 무역학과 학생들을 위한 번역. 쏠쏠하니 정성을 다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우연한 찰나. 세 가지 알바를 동시에 때려쳤다. 그들의 삶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 나의 처지를 번갈아 볼 만한 순간이었을까.

성적우수 장학생으로 캐나다 교환학생 선발이 되는 바람에 마음이 기어이 수선스럽고 말았다.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 게 이유라면 아름다울 뻔 한 알바생의 최후. 였겠으나.

전액지원 장학프로그램. / 허나 여느 가정에선 오직 현지 생활비를 보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런 기회가 고사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고, 하루 이틀 쯤 아주 조용히 마음으로만 엄마, 아빠를 원망해 봤다. 동시에 나의 알바의지도 잠시 심드렁해졌다. 그 때 한동안 출석을 제외한 삶의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고야만 내 마음이 아직도 어렴풋 기억에 있다.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돈 될 만 한 일들을 오래도록 한 걸 보면 마냥 싫지는 않았나 보다. 일을 가리지 않고 뭐든 해내는 배짱은 대학내내 갖추고 살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건 매번 쉬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 공간에서 내가 하고자 할 때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일.

남 눈치 볼것도 없이. 상대가 만족할지 여부를 고민하며 행동할 필요도 없고. 나로 인해 누군가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으니.

그야말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내게는 생계유지 외에도 또 다른 분명한 '알바목적'이 있었다. 학생 본분을 잊은 듯 쉬지 않고 남의 돈을 벌어야 할 뚜렷한 목적이었다. 내겐 그랬다.






이미지출처: 다음, 픽사베이, 내사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