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 먼저 보내다는 건

아빠의 딸과 아빠의 엄마, 상실의 깊이는 참 달랐다.

by orosi
그동안 가난했으나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고 나니 가난만 남았구나.



팽목항에 내걸린 세월호 유가족의 표어다.

내 아이를 보낸다는 경험.

감히 해보지 않은 부모로서 어찌 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아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모두 담았다고 본다.



부모로서 내 아이를 잃는다는 것을 간접 경험한 적이 있다. 2009년 경기북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교직원 협의 시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말 대신한 고모의 목소리.


윤미야,
아빠 3개월 정도 예상한다네.
폐암 말기 진단받으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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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평온했던 삶에 며칠 새 '끝'이 찾아오는 방식도 참 간결하구나. 3개월.


1기, 2기, 3기 이런 좋은 표현들도 많은데 어째서 하필이면.

가혹했다. 대상을 알 수 없었으나 깊이 미웠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뺑소니 사고로 두 다리를 잃으셨을 때 느꼈던 상실감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이번엔 '끝'이 있다는 메시지였으니까.



불과 며칠 전 아무렇지 않게 ‘다음번 네가 강릉에 내려올 땐 아귀찜으로 메뉴를 정했다’며 가끔 보는 딸아이와 멋쩍은 통화를 하던 분에게 남은 시간이 그렇단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있기나 한 걸까.



아빠를 만나러 가는 영동고속도로 위에서 '아귀찜 맛집'을 검색하려다 말고 고쳐 썼다.


SUV / 튼튼한 차.


발령받은 지 고작 1년 반이다. 수중에 돈이 있어봐야 얼마였겠나.

'상관없다. 우선 차를 사자. 이왕이면 튼튼한 차로.' 사고가 나더라도 적당히 다치려면 큰 차를 사야지. 장롱면허로 운전경험이 많지 않았다.


나와 '새로 출고된 차' 사이에는 겨를이랄 게 없었다. 퇴근과 동시에 겁도 없이 시동을 켜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졸다를 반복한다.

날이 밝으면 8:30분까지 늦지 않은 출근을 위해 서둘러야 했다. 강원도와 경기도 사이.

목숨을 건 나의 장거리 출퇴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양지 IC를 나와 강릉 IC를 통과하는 두세 시간 남짓.

라디오를 켤 줄도 몰랐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음악도 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새 포남동 집 앞이었고, 항상 내리기 전 거울을 확인했다.

긴 시간 운전만 하고 온 줄 알았는데, 초보운전 주제에 울기까지 한 게 여러 날이었다.


남들 다 한껏 치장하고 향기까지 생기롭던 대학시절, 단벌 신사마냥 운동복차림에 백팩 멘 구린 여대생이었는데.

강릉 가는 길만큼은 예쁘게 차려입었다. 아빠에게 보일 내 모습이 세상 누구보다 말끔하고 빛나기를.

(멋 모르는 사회 초년생, 그에겐 누구보다 자랑스러웠을 딸. 이제 좀 효도란 걸 해보고 싶었을 그때 그 윤미의 마음이 떠올라 이 순간도 다시 눈물이 난다)


누군가는 바다를 향하는 기대로 지날 이 길 위에서 나에겐 기대랄 게 없었다.


3개월 알림을 받은 건.

겨울 방학식 협의회 중이었으니 12월 말이었을 거다. 그러곤 정확히 5월 3일.

새로 발령받은 학교 운동회날 아빠가 갔다. 멀리 가셨다.

아빠의 의식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버텨왔는데. 방학을 제외하고 3개월도 채 안되어서 튼튼한 차의 쓸모를 잃었다. 3개월.

모질게도 정확하구나.





2009년 마무리와 2010년 새해가 나에겐 참 지옥 같았는데 문득 어미인 할머니께서는 어땠을지 떠올려 본다. 이제야 내린 결론이라면


할머니와 나의 상실은 참 닮았고,

그 깊이는 참 달랐다는 점이다.


'아빠의 딸', '종복이의 엄마'로

우린 그렇게 같이 슬펐고 달리 슬펐다.





아버지가 통원치료로 항암 하는 것이 더는 어려워 다시 입원하게 된 봄날.

어렵게 할머니께서 병실을 찾아오셨다. 의식이 들었다 말았다 하는 아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하얀 병실 벽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팔짱을 끼고 1층 로비로 나가 앉았다. 마침 뉴스에서 천안함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고,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할머니도 배 타봤어?
나는 작년 직원 여행 때 서해안 가서 배 탔다가 교장 선생님 앞에서 토했잖아.

아~ 진짜 웬일이야~


손녀라면 끔찍이도 귀여워하시던 그녀.

‘우리 강아지, 우리 애기~’하면서 물고 빨며 날 키워내신 할머니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넋 나간 사람 마냥 그렇게 한참을 미동도 없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나 슬픈 건 둘째치고 어떻게든 그 정신을 부여잡고 바로 세워 드리고 싶었나 보다.



할머니,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예고도 없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었네. 그치?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은 거야. 근데 우린 아니잖아. 아빠 살려보자. 나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데 뭐가 걱정이야. 내가 휴직이라도 해서 아빠 살릴게. 엄마는 우리 시집도 보내야 하니 일하라고 하고, 내가 아빠랑 운동도 같이 하고 좋은 음식 해드리고... 응? 우리는 시간이 있잖아.

아빠 당장 안 돌아가셔. 할머니도 기운 차려야 아들 살리지 않겠어? 할 수 있는 데 까지 해보자.”


죄다 잔뜩 포장했다. 거짓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다 해낼 것처럼 말한다.


우유 유통기한 마냥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결국 살릴 수 없다는 것.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모른건 아니다.


그럼에도 할머니부터 살려야겠다는 심정으로 희망 고문 가득 담아 쉬지 않고 쏟아냈다.

잡은 손을 어째서 뿌리치셨다. 꽤 오랜만에 예쁜 손녀에게 성도 내셨다.

위로하려다 간만에 맛본 낭패였다.


저 사람들 고통? 그거 난 모른다.
난 내 새끼 아픈 거밖엔 모르겠다. 지금은!

저들은 저렇게 하루아침에 새끼 잃었으니 몇 달 남은 나보곤 저거 보고 괜찮으란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릴 해.
니 아빠 죽으면 나도 죽는 거다!






아이라는 행복

아이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잃었다는 고통

그 당시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알지 못했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었나 보다. 아버지가 떠나고 난 다음 해.

건강하던 그녀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쓰러지시고 그렇게 10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만 계시다가 제 작년 아들 곁으로 가셨다.


이제라도 사죄드리고 싶다.

아이라는 행복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는데

곧 잃게 될 것에 대한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을

미처 안아주지 못해 정말 죄송했다고.





내리사랑이니 모두 이해하시겠지.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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