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기꾼입니다.

의리, 도리, 빚갚음이라는 핑계

by orosi


ㅣ사기꾼ㅣ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나를 아끼는 친구가 나에게 붙여준 지독하게 적절한 애칭이다.

내 삶이 거짓말로 점철돼 있다는 것을 나를 알게 된 지 불과 몇 해 만에 알아챘다. 예리한 녀석.

우리가 짧은 시간동안 너무 깊이 친밀해졌거나, 그녀의 '사람 좀 볼 줄 아는 감식안'이 하필이면 탁월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일상이 진실과는 잦게 괴리되어 있어 일회성 인연이 아니고서야 다음 번에 동일한 주제에 대해 다시금 대화하게 되는 것에 다소 불안을 느낀다.

내가 전에 뭐라고 둘러댔더라?


그때부터는 말을 아낀다.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조합해보거나 대화 속에서 얼추 실마리를 잡기 위해 탁락한 경청가로 슬쩍 둔갑해버리기도.

최측근이 아니고서야 나를 향한 호구조사는 대체로 부정확하고 참 다양하다. 얼마나 다양한지는 주인공인 나도 잘 모른다. 인연이 얕은 상대와 다루기도 아주 흔한 소재, 친정가족에 대한 정보조차 그렇다.

그러고 보니 가장 사랑하는 남편과 내 아이들에게도 나는 솔직하기를 포기하며 살아왔다. 굳이 언급하지 않은거라 치고 산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편린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음... 그게 아마도, 그랬던가?" 뭐 이 정도로 애둘러 넘기거나 적당히 꾸미거나 해서 그때 그때 순발력이 필요한 적도 여러차례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진실될 필요도 있었는데... 앞으로의 내 과제다.


핑계를 대자면 아마도

'어줍잖은 의리, 보잘것없는 도리'였거나 '그녀와 나 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간직하고 있을지 모를 빚갚음'따위 인지도.




나는 매 겨울마다 슬프다.

다행히 2020년 이후 예전처럼 몰래 울거나 한 껏 동굴로 숨어 버리지야 않지만 여전히 마음이 잔뜩 시리다.


엄마를 잃어버린 2010년 1월 7일

그 하루가 마치 어제 같다. 식상하지만 이외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질 않을 만큼 그 날이 내 기억의 지척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편은 내게 뇌사진을 찍어 보기를 권한다. 장면 장면 최근의 일도 징하게 잘 잊고, 중요한 일정도 곧 잘 놓치며, 내가 내 뱉은 말도 자꾸만 처음 듣는 듯 되려 되묻는 게 내심 불안한 탓이리라.

그럼에도 그 날이 바로 어제와 같은 건 손끝 깊이 박힌 가시 같아서가 아니다. 그건 남들 표현밖엔 되질 않을터. 내가 여전히 엄마를 고마워하고 있어서다.

10년이 훌쩍 지난 이 순간도. 어쩌면 누군가 내게 또 사기를 친다할지 몰라도! 원망따위 티끌만큼도 없다는 게 내 유일한 진심이다. 신기해해도 좋다.


엄마가 사라졌다. 1월 7일 새벽.

그 때부터 줄 곧 13년을 보래야 볼 수가 없었다. 못 살것 같이 아팠는데 난 지금 그럭저럭 살고 있다.

엄마가 사라진 경위를 포장해 사기치는 게 내 과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나를 낳지 않았다는! =>> 내게는 그닥 큰 의미가 아닌 사실을 오래도록 덮어두었다. 그것만은 철저히 대부분의 지인, 남편에게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마치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치부될 것이 몹시 불편하고 아팠다.


알고 있었으리라.

대부분의 내 아픔을 알고도 모른척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던 걸 보면, 적당히 추측하되 쉽게 단정짓지 않았을 뿐이었을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따위 기타등등'에 의미를 부여할 인물은 못 되었다.


퇴근 길 무슨 이유로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 가야 했던 날. 아무 생각없이 초본을 떼어 조수석에 타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혼났다. 혹시 보았을까? 어째서 엄마 이름에 오래도록 불러보지 않은 부적절한 타인이 자리하고 있는 건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이제 내게 엄마는 단 한 사람밖에 없는데 말이다. 입을 닫고 잠잠히 멈추어 있었다. 또 한번 사기꾼이 되는 경험이었으나, 그도 더 묻지 않았다.


사기가 들통나는 순간 느껴야 할 뜨끔함이나 난처함보다도 엄마의 진심이나 사랑에 괜한 낙인이 찍힐까 두려웠다.

또 한번 슬펐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에 그녀가 없는 현실 처럼. 이따위 문서에서 조차 왜 수진씨의 이름이 없냔 말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모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여러 해 나는 그 날 그 새벽으로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소원을 빌었었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빌었다.






투병 중인 아빠를 위해 암막 커튼을 새로 장만했는데 새벽 2시를 갓 넘은 시간, 잠결에도 눈이 부시다.

현관 신발장 불이 켜지고 현관문이 조심스레 닫혔다. 이 시간에 누구?


"언니, 누구 나간 것 같아" 꿈이거나 잠결이다.

"어, 바람쐬러 자주 나가셔. 다 울면 올거야. 얼른 자."


골반쪽으로 폐에 있던 암세포가 전이되면서 아빤 거의 매일 밤을 꼬박 세웠다.

동이 트고 나서야 겨우 잠 들기를 여러 날, 여러 달.

입원치료와 통원을 번갈아 하던 때라 집에 머무는 동안은 적극적 처치라곤 진통제와 패치 뿐이었다.

밤새 곁에서 여기저기 주무르고 두들기며, 한껏 날이 선 암환자와 함께 아픈 건 온전히 엄마몫이었다.

정작 몰래 아픈건 본인인데, 낯빛에 티끌만큼의 그늘도 드리워선 안되는 것도 엄마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날은 언니를 깨워 남대천 뚝방을 걸었다고 한다. 방학이라 강릉집에 이제 막 내려 온 작은 딸을 안고 가게를 정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우셨다. 아빠 간병은 엄마가 해야 마땅하지만 생계를 내려 놓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해 받고 싶어하셨다. 니 아빠 죽으면 나도 죽는 거라며 약속이나 한듯 토시하나 안틀리고 할머니마냥 얘기하셨다.


그런 엄마가 가족들이 모두 모여 방을 채우고도 거실에까지 이부자리를 펴야 했던 그 날.

돌연 증발해버렸다. 끓는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수증기로 변해 별안간 사라지듯.

'어느 순간' '어떻게'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와 하필 함께 읽으며 울고 웃던 신경숙 작가의 소설이 현실이 된 듯 머리가 하얘졌다.





011-9796-3451(이제는 국번이 없다는 이 전화번호를 나는 요즘도 가끔 눌러 보곤 한다)


다 울면 올거라는 언니의 말도 귀에 담아지지 않아 몸을 일으켜 휴대전화를 든다. 011-9796-3451

내가 미쳐! 진동벨이 거실에서 울린다. 지갑도 그대로다. 당황도 잠시, 연락처 검색창에 '노래방 아줌'까지 치고는 통화연결 버튼을 눌렀다. 부모님의 가게 옆 노래방을 운영하시던 친구분은 새벽까지 손님을 기다리시다가 마침 셔터를 내리려던 참이라 하셨다.

"아줌마, 우리 엄마 혹시 또 거기 가셨어요?"

"여기? ........................................... 지금?"

아니구나. 얼른 겉옷만 걸치고는 뚝방으로 뛰었다.

'왜... 왜 전화기가 여기 있냐구. 어째서'

내 손에 쥐어진 엄마 전화기가... 그꼴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다. 제 자리를 알지 못하고 왜!






밤새 내린 눈에 발이 푹푹 빠졌다. 그 와중에도 아빠 통증패치를 갈 때가 된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온 가족이 그렇게 아빠에게만 온 마음을 내어 준 그 시절.

누구 하나 엄마에게 곁을 내어주질 않았다. 멍하니 있다가 접시를 놓쳐 휘청이는 순간에도 모두들 아빠를 걱정하기 바빴다. 접시를 놓친건... 엄마가 아니었나.


그래. 바람쐬러 가신거고,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이 아줌마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전화기는 깜박해도 지갑은 가져가야지. 으이구. 정말!


돈이라도 챙겨가야지! 라는 생각은 그 날 한 번 하고 만 것이 아니다. 몇 주, 몇 달, 몇 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내 머릿속, 내 가슴속에 맴돌며 잔 상처를 남겼다.


바보같은 사람. 우리집에 와주어서. 내게 동앗줄이 되어줘 놓고. 죽으려다 다시 살도록 아빠와 내 손을 기꺼이 잡아주고선. 어째서! 돈이라도 챙겨가지. 바보 천치같으니라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인연이 이토록 가슴 절절하게 오래도록 그립다는 게 놀랍다지만 ...그런 사람들은 내게 유별나다고도 하지만, 나에게 이 그리움은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지극히 자연스럽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이상함이 없고, 순리에 맞고 당연한 그런 류의 감정.



결혼 1년 전 1월 7일, 5월 3일

차례로 엄마와 아빠를 잃고 그 해 나는 정신 이상자처럼 살았다. 실제 미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5월 3일까지는 아빠를 살리려고 정상인인냥 사기를 쳤고, 그 후로 오랫동안 혼자 지낸 예비 신혼집에서 현관문과 안방문을 굳게 잠그고도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아침을 맞았다.


그러다 하루는 그 사단이 난거다.

깊은 밤도 아닌 새벽 5시, 누군가 나 혼자 자고 있는 안방문을 열기 위해 날카로운 도구로 거칠게 애썼다.

안자고 있었던 것 처럼 직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심장소리가 몸 밖으로 진동하듯 미친듯한 속도와 크기로 울려댔다. 가슴이 이렇게도 뛰는구나.

겨우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까치발로 서서 겨우 안방 옷장 안으로 숨어 들었다. 드레스룸엔 어찌 잠금장치가 없는지 원망스러웠다. 곧 나의 시댁이 될 곳에서 곤히 자고 있을 남편을 깨웠다.

목소리를 크게 낼 수도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보내고 다시 전화를 걸기를 반복했다.

"오빠, 얼른 와줘.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오려고 해. 어서!"


넘어지면 코닿을 거리인데 5분이란 시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나.


너무 떨어서 계속 기절하지 않은 상태로 버틸 수 있으려나 하던 찰나에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전해진다. 살았다. 허나 격투전이 두려웠을까. 어째서 날 구해주진 않고 다시 전화를 걸어오는 건지.


"윤미야, 꺽쇠! 안쪽에 꺽쇠가 걸렸잖아. 들어갈 수 가 없어.
어쩌지. 베란다쪽 문으로 얼른 뛰어와서 열어!

뭐야... 지금 오빠가 하고 있는 말을 저 사람이 다 듣고 있을텐데, 나보고 어찌 뛰라는 거며, 이 상황에 나와서 문을 열라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못해

한마디 던지고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울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도 모를 때 쯤 현관에서 요란한 기계 소리들이 계속되었고, 곧 남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야, 이제 괜찮아. 문열어봐

옷장에서 나가 어찌 안방문을 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정신을 잃은 듯 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비 시부모님과 남편 말고도 낯선 사람들이 내 앞에 서있었다.


괜찮으세요? 저흰 집 안 확인 후 이상없으면 철수 하겠습니다.


경찰이었다. 현관문 꺽쇠라 불리는 것은 두동강 나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거 마셔라.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으니 정신 차려" 어머님께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아무도 없다니. 말도 안돼.

나는 지금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게 사기가 아니면 뭔가. 내가 분명 눈 앞에서 두 귀로, 온 몸으로 느끼질 않았나!

어째서 아무도 없었단 말인지. 그 후로 오랫동안 화장실 천정 환풍구에서 낯선 사람이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퇴근 후 들어 온 빈집 쇼파에 그 사람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꿈도 반복해 꾸었다. 그리고 그 당시 임창정이 주연인 몹쓸 영화처럼 엄마의 장기를 팔았다며 협박 전화를 걸어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주 귓가를 맴돌았다.




엄마를 찾기위해 여러 도시를 , 처음 밟는 시골 땅들을 누비고 다니며 운전실력이 나날이 늘었다. 물론 대상을 알기 어려운 원망도 함께 늘었다.



그렇게 2011년 4월.

부모님 없이, 눈물도 없이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생활에 대한 그 어떤 기대와 계획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많이 지쳐 있었지만 지친 채로 바삐 몸을 움직였다. 결혼 초기 나는 뭘 해도 남편과 같이 했다. 출근 부터 퇴근 후 요가를 하든, 도서관에 가든, 야근을 하든, 심지어 대학원까지도 혼자하는 법이 없었다. 오래 두렵고 오래 외로운 탓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마운 버팀목이었고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두운 터널을 내내 함께 지나온 사람이다.

어버이날이자 아빠의 기일이 있는 달이나 드라마에 부모님에 대한 스토리가 전개될 때면 어김없이 울었다.

그런데 이번엔 남편이 나를 안고 꺼이꺼이 운다.

"2008년 가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우리 윤미 참 밝고 예뻤는데... 1년 반 만에 너무 아프기만 했다"

이 말을 겨우 잇고 한참을 울었다.

미안한 줄도 모르고 그 후로도 꽤 오래 나는 '우울함과 덜우울함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이제 아이들을 키우며 바삐 사느라 덮어둔 그리움은 언제든 수면 위로 떠오를 테지만, 이제 나도 엄마가 되니 감정이 색을 달리해 간다.




'꼭 찾아야한다. 찾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괜찮을 수 있을까' 라는 강박을 겨우 내려놓았다. 엄마도 그걸 원하실거다. 내가 괜찮은 삶을 살고 괜찮은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참 잘했다고 하실거다. 그간 사기꾼으로 살아온 삶, 모두 이해한다고... 그래도 앞으로는 솔직한 윤미로 당당한 엄마로 살아가라고 말씀해주실거다.



여전히 나는 엄마가 그립다. 여전히 나는 엄마가 고맙다.

나를 낳아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당신이 떠났거나 사라진 '이유'간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어요. 다른 가족들이 혹시라도 하고 있을지 모를 원망이 내 마음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난 그저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고,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나를 다시 살게 해 준 당신은 내 인생의 은인이라고 꼭 안아주고 싶어요.

그리고... 어딘가 살아있다면 부디 살면서 꼭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바람이 전해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보고싶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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