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엔 주로 비분강개

시댁이 아닌 친정을 향하며 매번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

by orosi

열여덟 소녀였다.

나는 괜찮기를 선택하고 이제 막 다시 살고 있는데, 끝도 없는 히스토리를 펼치다 보면 끝날줄 모르는 불행의 깊이에 상대의 슬픔이 더 진해진다. 본의 아니다. 매번 부작용이 따르는 수다로 끝나는 찝찝함은 뭔가.


적당히 풀어내고 멈추는 지혜가 잦게 요구된다.


'6학년 사춘기 소녀의 예기치 않은 이별'로도 한 사람의 생애 가질 경험은 충분치 않은가.

(어떤이는픽션이냐고도 묻는다. 하하)

엄마를 잃어버리고 겨우 먹고 산 지난 13년의 세월만 풀어내도 매한가지다.

아빠와 나, 3개월 겨우 버티고 잔인하게 정확했던 원망스런 헤어짐은 또 어땠나.



사랑했고 사랑한다. 뭐 그렇다고 '새엄마'라는 키워드가 남달리 나에게 첫사랑처럼 달콤하기만 했을까?

그녀를 온마음 다해 사랑했다는 나의 진심을 차치하고서라도, 배 아파 낳지 않은 분 곁에서 속없는 비수와 남들 질문에 애써 속여가며 살기란 그 나이에 녹록지 않았을 거다.




이게 다 인가... 내 유년시절을 껴안는 설날 이른 새벽시간,


문득 떠오른다. 아! 또 있었지.

많기도 하다. 너... 어찌 살았니.




나는 공부하기를 즐겨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40 먹고도 또 학교에 다니고 싶고, 밤낮으로 나만의 공부시간이 주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아마도 이 경험도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중1 기말고사. 학급 4등/ 전교 92등

중2 중간고사. 학급 1등/ 전교 2등

중2 기말고사. 학급 1등/ 전교 1등


당시 나는 기뻤다. 사춘기 시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어 무표정으로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지 못하며 살았는데... 드디어 내 뜻대로 되는 것을 하나 찾았다. 공부.


애쓰는 만큼 내게 보상을 주는 무엇. 아! 이런 것도 있구나.


전교 1등 성적표를 받아온 날 부모님은 희미하게 웃으셨다. 작은 딸이 받아온 성적보다는 큰딸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고 있는 내 곁에 와서 이불을 들추며 축하의 농담을 건넨 건 다름 아닌 막내삼촌이었다.

" 너 너무 비전 없는 거 아니냐? 최소 전교 2등은 해줘야 올라갈 계단이나 있지 이 녀석아! 전교 1등이면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네. 짜식!"

정말 고마웠다. 우리 집에도 나에게 두 세 마디 이상의 관심 있는 문장을 건네주는 사람이 아직 있구나. 열다섯 살 소녀는 무던했다. 그냥 그로서 충분히 격려받은 기분이랄까.

부모님을 잃은 지금도 나는 강릉에 가면 삼촌 곁으로 간다. 별 말 없이도 늘 위로가 되는 사람.

내게는 참 든든하고 고마운 존재다.


강릉에 무장공비가 쳐들어왔다던 중1, 그 해에 '사임당 독서실'은 때아닌 통금시간에 2회로 셔틀운영을 축소했다. 11시에 한번, 새벽 6시 한번.

그때도 시간이 부족해 6시 차로 집에 돌아왔다. 지금생각하면 정말 공부에 미쳐있지 않았나 싶다. 그저 좋았고 내게 위로를 주었다. 공부가 사람을 위로해주기란... 요즘 애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현재 내가 내 아이에게 전하는 공부란 것이 그때의 내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냥 넌 너 꼴리는 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렴^^)


그리도 공부가 좋았던 소녀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소위 코끼리(회색교복 입고 공부만 하는 여학생집단이라는 이유로 참 저렴했다. 애칭이라 치자) 학교인 강릉여고에 진학했다. 고입시험(?) 이란걸 보는 날도 이게 시험인가 싶게 자신만만하게 쫄면을 먹었다.

그렇게 여고생이 되어 성적순으로 반장을 시킨다기에 반장을 했고, 졸기라도 하면 실장님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매섭게 째려보는 '신세대 독서실'에서 밤을 불태웠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도 집으로 향할 줄 몰랐다.

너무 일찌감치 공부 맛을 봤던가. 그런 나를 잠시나마 쉬게 하려던 신의 뜻이었다기엔 또 한 번 잔인했다.


새벽 3시가 되어야 가게문을 닫고 귀가하시던 부모님은 지금의 나만큼 힘들게 사셨다.

그날은 어째 오실 줄을 몰랐고 4시가 지나서 현관문 소리 대신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할머니가 받으셨고 끊고도 횡설수설하셨다. 어떻게 옷을 챙겨드리고 택시를 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동인병원, 난 이곳이 익숙하고도 낯설다. 여러 번 아빠를... 그리고 마지막 할머니를 보낸 곳도 바로 여기다.




응급실에 들어서서 정신이 나가있는 엄마를 아는 체 하기도 전에 내 눈에 아빠가 비친다. 얼굴부터 본 게 아닌데 두 다리를 보고 아빠인 줄 알았던 건 내가 사드린 양말 덕이었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다리 곁에 하필이면 양말이 단정하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울 수가 없었다.

잠시 정신이 든 아빠가 내게 화를 내셨다.



내가 왜 여기 누워있어! 내가 왜 여깄냐구!




그러게요. 아빠.

왜 여기 누워계세요. 열여덟, 지금 생각해 보면 징하게 어린 나이였지만 울지 못했다.

놀라느라 바빴던 모양이다.



얼마 전 금쪽같은 내 새끼의 가엾은 중학생 사연을 보다가 문득 몇십 년 만에 든 생각은

음주운전이 아니었나 싶다. 강릉이야말로 관광지 아니던가.

내 기억에 그 시절 절절 끓는 깡만 챙겨 면허도 없이 운전대를 잡는 또래 아이들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잡자! 경찰이 안 잡아주면 이 새끼! 내가 잡는다!


그날부터 딱 일주일 슬프고 독을 품고 살았다. 8일째 되는 날부터 나는 아빠 병원에 가겠다는 이유로 종종 조퇴를 했다. 어렴풋이 삼촌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꿰어 맞추어 차량의 색깔, 떨어져 나간 사이드미러 방향 등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했으리라.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가 매일 교복 차림으로 강릉,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말이다.

성적은 참 꾸준히도 계단계단 내려가고 있었다. 역시나 공부란 참정직하다. 내가 하는 만큼의 결과만 내게 가져다 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리가 퉁퉁 붓도록 치열하게 찾으러 다녀도 그 망할 새끼를 잡을 수 없었는지. 공부가 아니라서 한 만큼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나 보다. 슬펐다.

수업시간에도 계속해서 적었다. 내가 다녀간 곳과 아직 가지 못한 곳들을 빼곡하게 정리했다.

노트필기를 그렇게 했더라면 친구들과 같이 SKY에 입성했을까? 하고 웃어본다.


경찰도 찾기를 포기했고, 나도 대학을 가며 그 짓을 관뒀다. 길고도 짧았다.

내가 지금 1시간이고 2시간이고 힘들이지 않고 잘 걸어 다니는 데에는 그때 쌓아둔 내공덕이다.

대학 내내 1시간 15분 거리를 걸어서 과외 다녔던걸 보면 다리도 튼튼하고 버스비도 아꼈으니 참으로 현명했다. 요즘 건강 챙기라고 만보 걷기가 유행이라지 않나.



그러니 대학에 잘 갔을 리가 없다.

강릉여고에서 수능을 치르던 날, 그날도 삼촌이 휠체어에서 아빠를 번쩍 안아 차에 태우고 15분 거리의 학교에 기어이 나를 태워 날랐다. 응원이 민망했다. 잘 볼리 만무했고 잘 볼 의지도 없었다.

익숙한 환경에서 시험을 치러 너무 다행이라며 친구들 부모님들은 플랭카드에 염주(?) 뭐 그런 것까지 챙겨 와서 기도빨을 세우고 계셨다. 내가 강릉바닥을 누비고 있는 동안 동일한 강도로 빡세게 입시 준비를 하며 밤을 새웠던 친구들이 대견하고도 낯설어서 함께 부둥켜안고 기대하는 척도 해 주었다.



나는 그날 1교시 언어영역시간 어떤 지문이었는지도 모를 어렴풋한 글 때문에 울었다. 감독관은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얘가 울기까지 하나 싶어 당황하며 휴지를 챙겨줬다. 귀여운 신참 교사 같았다.

2교시에는 적당히 풀고 머리가 아플 참에 평가지에 남문동, 명주동, 포남동, 입암동 따위의 단어들을 나열하고 지워가기를 거듭했다. 점검단이 있었다면 얜 뭐야 했겠지만 20년도 넘은 일에 난 웃는다.

급기야 가장 수월했던 외국어영역을 후다닥 풀고는 따뜻한 난로 곁이라 졸기까지 했다.


입시에 진심인 대한민국, 강릉여고생이라기엔 좀 괴짜 같은 하루를 보내고는 어스름한 시간 어스름한 정신으로 교문을 나왔다. 대학은 그냥 집에서 적당히 멀고, 영어공부는 하되, 학비는 안 들고, 월세를 내지 않을 자유 정도만 갖추면 어디든 괜찮았다. 그렇게 첫 번째 대학에 들어갔고, 부모님은 그제야 중고등학교 시절 (고등학생 때야 뭐 걷기 운동하느라 2학년초까지만) 내가 받아온 성적표를 의아해한 듯했다.


그래도 지버릇 개 못주고 공부했다.

대학공부는 더 재밌는 건 말해 뭘 해. 친구들 미팅하러 다닐 때 나는 전공, 교양은 물론 남자친구 전공수업도 같이 들어가고 약학과, 교육학과, 경제무역학과, 특히 철학과 수업도 몰래 청강하러 다녔다. 학비도 안 내면서 제법 가성비 좋은 대학시절을 보냈다. 기숙사에 살면서 알바도 죽자고 했으니 방학 때 서울서 다닐 학원비 정도야 강릉에 손 안 벌려 좋았다. 열심히 사니까 여기저기서 기회도 많이 주셨지만 거저 보내준다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힘들었다. 교환학생을 가려면 생활비만 있으면 된다는데 생활비를 줄 수 없다고 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바로 수긍하고는 다시 열심히 돈을 벌었다.


사람들은 내게 부모님이 야속하지 않았냐 묻지만, 적당히 야속하고 재빨리 잊었다. 야속해한다고 보내주나? 하하하.


방학 때까지 잔뜩 채워 수업을 듣고 또 들었다. 4.5만 점에 4.48이라는 학점을 받고 생활비 아낀답시고 남들보다 한 학기 일찍 졸업을 해버렸다.

할 공부는 다한 것 같고 남은 몇 달 바짝 논술연습하고 면접준비(사실 준비랄 것도 없이 혼자 남의대학 도서관에서 책 읽은 게 다지만)해서 교대에 들어갔다.


두 살 어린 귀요미들은 대학생활이 지루했나 보다. 나이는 많지만 나에겐 또 한 번의 새로운 경험이랑 분임발표나 조별 과제가 있으면 내가 해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공부도 내겐 참 피가 되고 살이 된 건지 나는 지금도 공개수업이나 강의를 즐기는 편이다. 돈이 안되어서 그렇지 천직이라 생각한다^^


강릉은 내게 나고 자란 곳이다. 그냥 나고 자란 곳은 아닌 듯하다.

가는 길이 늘 버겁다. 마음이 철저하게 시리고 화도 많이 나는 도시. 하얼빈도 나름 중국최고의 휴양지이잖나. 안중근모드.

그곳과 강릉의 닮은 점이 있어서 인가.

나는 종종 강릉을 떠올리며 비분강개한다.


명절이면 대개 시댁을 떠올리며 분개하거나 복받침을 느낄 텐데

참으로 다양한 상처로 나는 친정을 향해 비분강개한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오늘은 그냥 바다 보러 가자. 저런 감정 용인에 두고 가자. 그냥 남들처럼 가자. 곁엔 없을지라도..엄마랑 아빠에게 안부 묻듯


나 지금 출발해! 하며 혼잣말도 해보자.


그렇게 개운하게 시동을 건다.


후기..

왕복10시간운전;;다녀온후기-

이번 바다는 유난히 예뻤고.. 잔잔히도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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