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
스피치 강사로서 처음 맡았던 수업은 성인이 아닌, 1:1 키즈 스피치 수업이었다. 그전까지 했던 분야에서의 가장 어린 강의 대상은 중고등학생이었다. 그래서 ‘키즈’, 그것도 ‘1:1’이라는 말에 낯설고, 긴장됐다. 처음 인사부터 마지막 작별 인사까지. 전부가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맞이하지? 재미없어하면 어쩌지? 나를 무서워하면 어떡하지?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는, 작고 조용했다. 나는 준비해 둔 수업을 꺼내 들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질문을 주고받고, 그림을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로 풀어내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그날.
아이는 한 시간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말은 아이의 귀에 닿고 있었다. 하지만 입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소극적인 박수 한 번. 그것이 아이가 보여준 가장 큰 반응이었다. 그날 나는, 말을 가르치러 왔다가 말이 꺼내지지 않는 풍경 앞에 멈춰 섰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아이는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아동이었다. 낯선 환경에선 극심한 불안으로 인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나는 그날 밤, 논문과 사례를 찾아 읽었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다시 말을 열게 되는지, 무엇이 그 문을 다시 열게 만드는지 간접적으로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질문 하나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말은, 어떻게 꺼내지게 되는 걸까?
말을 가르친다는 건 무엇을 말하라고 지시하는 일이 아니었다. 말이 자연스럽게 꺼내질 수 있도록 그 조건을 만들어주는 일. 그 조건은 기술이 아니었다. 훈련도, 반복도 아니었다. 그 말이 나와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 그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 말은, 그런 곳에서 조용히, 아주 천천히 피어났다.
이 아이를 통해, 나는 '스피치 강사'라는 일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건… 어쩌면 사람을 살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잊고 있던 오래된 그림들이 떠올랐다.
“선생님,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 매일 실례를 하고 집에 돌아가던 초등학교 1학년의 나. "안녕"이라는 인사를 입이 아닌 손짓으로만 대신하던 나. ‘싫어요’ 한 마디를 못해서, 아무 말 없이 낯선 사람을 따라가야 했던 작은 나의 모습이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처음부터 말이 트였던 사람이 아니었다. ‘안 돼요’, ‘싫어요’ 그 단순한 말들을 못 해서 넘어야 할 순간들을 넘어가지 못한 채 내내 머물러 있던 어린 내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말이 늦게 열린 나는 훗날 ‘소통’이라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오래, 깊게 생각하며 이 지점까지 와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만난 한 수강생이 있다. 병원에서 근무 중인 성인 여성분이었다. 그분은 사회 초년생 시절, 전화 응대 중 뒤에서 팀장이 끊임없이 말투를 지적했다고 했다. 그 기억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날 수업 중, 그분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셨다. 가장 나답게 나와야 할 ‘말’이라는 행위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강제와 통제로 인해 막혀버렸던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말을 잘하게 한다는 건, 그저 말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말이, 그 사람 안에서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일이다.
이후 나는, 비슷한 아이를 만나면 다르게 접근한다.
‘지금 이 아이는 어떤 세계를 보고 있을까.’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어떤 마음의 강을 건너고 있을까.’
그걸 먼저 궁금해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세계 안으로 조용히 들어간다. 말을 재촉하지 않는다. 아이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주었을 때,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그거, 나도 좋아하는데. 왜 좋아?
나도 세 가지 말해볼게."
"첫 번째는… 두 번째는… 그리고 세 번째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눈으로 말해줘도 돼. 손가락으로 알려줄래?
이렇게— (손가락을 피며) 하나, 둘, 셋."
그리고, 나도 조용히 숨을 쉰다. ‘하나… 둘… 셋.’
상대방의 시선에 내 시선을 억지로 맞추지 않는다. 그 사람이 바라보는 지점에 내 시선을 조용히 맞춘다. 이건 단순한 ‘경청’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듣고 내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다. 그 일을 위해 나는 먼저 조용히 숨을 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에서 안전함을 찾을 때 비로소 말을 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전함은 온전히 나의 말을 들어주는 누군가로부터 온다. 그 시선과 태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금 여기’에 머물게 된다.
그 이후, 말은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제야 상대의 감정과 욕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존중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ㅡ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우리는 존중받을 때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말은 조용히 피어난다.
그 수업 이후, 나는 ‘강사’라는 정의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전달자’였다. 말하는 법, 구조, 스킬을 알려주는 사람.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안내자’가 되고 싶어졌다. 말이 꺼내질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 그 마음의 속도를 따라 기꺼이 기다려주는 사람.
그리고 비로소 깊게 깨닫는다. 말은, 결국 ‘듣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건 단지 소리를 듣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감정을 지나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마음.
그 마음이 없으면 말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 아이의 침묵은 ‘안 들린다’는 문제가 아니라, ‘안전하지 않다’는 메시지였다. 그 깊은 내면의 메시지를 읽는 사람. 그가 바로 소통의 진짜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감사하게도 전달자가 아닌 안내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결국은 또 다른 전달자를 만들고 있다. 자기 말을 찾아낸 사람이 다시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전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그 아이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 덕분에 평생 지켜야 할 원칙 하나를 얻었다.
말은 입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은, 누군가가 조용히 듣고 있을 때 비로소 열린다.
누군가의 마음을 ‘말’이라는 방식으로 열고자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열리지 않는 말이 있다면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의 사람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그 마음의 욕구를 먼저 읽고, 그에 맞는 언어로 다가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소통의 시작입니다.
당신이 먼저, 그 안전한 세계를 열어주는 ‘경청의 전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 전달을 꿈꾸는 ‘전달자’인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