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속에서 나를 지키는 말하기
“도대체 뭐가 나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많은 내가 있어.
그런데, 이제는 점점 뭐가 나인지 자꾸 잊게 돼.”
이 말들은 내가 만나고 있는 수강생들, 그리고 지인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모습이 과연 ‘진짜 나’인지, 이게 ‘나다움’인지 혼란스럽다고. 너무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에 녹아든 채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어떤 게 나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다운 말하기’는 단지 익숙한 말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다시 인식하고 회복하는 과정이다. 말투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감각과 중심을 되찾는 일이다. ‘나다움’을 찾는 말하기란, 결국 내면의 감각을 회복하는 말하기다.
직장에서는 정제된 보고, 인간관계에서는 무난한 리액션. 우리는 매일같이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 말들이 익숙해질수록, 내 말의 결은 점점 흐려진다. 이 과정은 종종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퇴근 후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뒤엔 이유 없는 피로감이 밀려온다. 그제야 깨닫는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가 아닌 모습으로 말해왔다는 사실을.
이처럼 ‘나’와 사회적 기대 사이에 균형이 무너질 때, 심리학에서는 이를 ‘역할 과잉 동일화’라고 부른다. 융 심리학에 따르면, 성격은 타고난 기질에 후천적 환경이 더해져 만들어진 자아의 중심축이다. 자기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성향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내 기질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끊임없이 맞닥뜨린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페르소나'다. 나를 지키되, 관계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또 하나의 얼굴.
‘페르소나’는 본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무대 위 배우들이 쓰던 가면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우리가 사회에서 쓰는 ‘사회적 얼굴’로 해석한다. 즉, 페르소나는 단순한 위장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상황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다. 나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언어인 것이다.
문제는 이 페르소나가 무의식적으로 굳어졌을 때다. 원래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어야 할 사회적 역할이, 어느 순간 하나의 습관처럼 반복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말은 경직되고, 대화는 점점 단절된다. 이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각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가?' 말하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보자. 회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상사에게 보고할 때의 나는 어떤 말투와 태도를 취하는가? 낯선 사람과 인사할 때, 친구와 수다를 나눌 때, 가족과 갈등을 이야기할 때 이 모든 장면에서의 ‘나’는 같을까, 다를까? 우리가 그 차이를 자각하는 순간, 말하기는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이 장면들을 인식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페르소나’를 설계하는 일이다. 구체적인 말하기 상황, 그때 느끼는 감정 상태, 그리고 그 장면에서 취하고 싶은 태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사에게 보고할 때는 ‘정리 잘하는 해설자’, 팀 회의에서는 ‘센스 있는 전략가’, 갈등 상황에서는 ‘감정 조율가’라는 페르소나를 설정할 수 있다. 이때의 ‘역할’은 단순히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말투, 어조, 시선, 표정, 그리고 감정의 결까지 포함된다. 즉, 하나의 페르소나는 ‘말의 태도’를 구성하는 설계도인 셈이다.
이 과정은 단순한 상상에 그치지 않는다. 페르소나 설정은 실제 말하기 훈련과 연결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말하기의 롤모델을 설정하고 그들의 말하기 태도를 참고하는 것이다. 회의 발표 상황에서는 '유재석처럼 핵심만 간결하게 전달'하고, 감정 표현이 필요할 때는 '김혜수처럼 어휘가 단단한 문장으로 감정'을 담아낸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선 '박경림처럼 유쾌하고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중요한 건, 그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와 말의 결을 나에게 맞게 차용해보는 일이다.
나는 연극을 전공했고, 10년간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수많은 역할을 맡아왔다. 놀랍게도, 가장 내성적이던 시절에도 배역이 주어지고 상황이 분명해지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역할이 있다는 건 곧, 감정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오히려 말의 중심을 잡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 경험은 스피치 강사로서의 지금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무대에서 역할로 감정을 표현하던 일은, 현실에서 수강생들의 말하기를 안내하는 태도로 다시 살아난다.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수강생들에게, 나는 항상 이렇게 덧붙인다. “결국 이 말도, 상대방을 위한 말하기가 아닌 ‘나를 지키는 말하기’에요.”
‘나를 지키는 말하기’는,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기반 위에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가면이 ‘나’라는 존재보다 더 커져서도 안 되며, 반대로 페르소나 없이 ‘나’만으로 존재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나를 지키는 말하기’는 나와 ‘너’가 함께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역할로 말하고 싶으세요?"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많은 수강생들의 긴장은 확연히 줄어든다. 완벽한 자아로 말하려는 부담보다, 역할을 수행한다는 관점이 오히려 말하기를 수월하게 만든다.
이 접근은 단순한 심리 전략에 그치지 않는다. 역할이라는 틀을 가지게 되면 감정에 덜 휘둘리고, 말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무엇을 말할지가 아니라 왜 말하는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말에는 명확한 방향이 생기고 힘이 실린다. 익숙한 표현 틀 밖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면 말의 세계는 확장되고, 다양한 언어적 태도를 실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내면의 확신이 자존감을 조금씩 지지해 준다.
결국 말하기란, ‘나’를 어떻게 다루고 표현할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그 ‘나’는 하나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고정된 나다움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대신, 나는 이렇게 묻곤 한다.
“말할 때 자주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요?”
“평소 어떤 상황에서 자주 말을 하게 되나요?”
“나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말하고 싶나요?”
“이상적인 ‘말하는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죠? 어떤 말투를 쓰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은 말 속에서 자신을 설계하게 된다. 그것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싶은 태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된다.
이 질문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말하는 상황별 페르소나를 설계하고 연습한다. 예컨대 발표할 때는 유재석처럼 핵심만 딱 집어 정리하는 사람, 부탁할 때는 한지민처럼 예의 바르고 따뜻하게 말하는 사람, 가족과의 대화에서는 나문희처럼 진심과 현실을 적절히 버무려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각 상황에 어울리는 말투, 표정, 어조를 구체화하고, 그에 어울리는 롤모델의 이미지를 그려본다. 페르소나는 단지 껍데기가 아니라, 말에 결을 더하고 나를 지켜주는 내면의 도구다.
누가 뭐래도, 사람은 자기 기질대로 살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다양한 페르소나를 입는 일은 ‘나’를 잃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키는 방식이다.
혹시 말하기가 여전히 어렵고, 두렵게 느껴진다면 괜찮다. ‘역할’은 감정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안전지대다. 완벽한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말의 옷’을 입어보는 것. 그 단순한 선택 하나만으로도 말은 훨씬 덜 아프고, 더 자유로워진다.
결국 ‘나다운 말하기’란,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을 선택하는 일이다. 이런 말하기야말로, 단단한 자기 이해에서 출발하는 진짜 소통이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하기를 하고 싶은가요?
누구처럼 말하고 싶은지,
마음속에 떠오르는 롤모델이 있나요?
이제 역할을 입고 말해보세요.
그 페르소나는 당신의 말에 방향을 세우고,
당신만의 결을 꺼내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하기의 긴장을 줄이고
지금 이 순간,
말하는 즐거움에 머무를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