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아직 이별이 서툴다.

서툰 너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연습

by 송이

나는 사람과의 짧은 연결도 깊게 느끼는 사람이다. 엉뚱하게도, 그 짧은 순간들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어떤 날은 이름도 몰랐던 사람과 주고받은 말 한마디가, 몇 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가끔은 ‘내 감정 처리 용량이 이 정도였나…?’ 싶기도 하다. 친절한 손길, 가벼운 인사, 함께 웃었던 찰나.

그걸 왜 아직도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음,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일까. 짧은 인연이 끝나는 순간, 나는 자주 울었다. 소풍처럼 웃고 떠드는 자리가 끝나면 마음 한편이 꼭 도시락통처럼 휑했다.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끝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것 같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멀쩡한 날에 혼자 눈물 찔끔 흘리던, 약간 조숙한 감성러였달까.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별은, 여전히 서툴다. 상처 주고 상처받는 관계에 지쳐도 새로운 사람과 연결되는 순간이 반가웠다. 그리고 또 헤어질 걸 알면서도 다시 기꺼이 인연을 만들었다.


그랬던 내가 ‘이별에도 여러 결이 있다’는 걸 진짜로 알게 된 건, 강의를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 말의 끝에 마음이 묻어나는 사람들. 그들과 마주 앉아 조용히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달라져 있었다.


차가운 작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음에 또 만나요”가 아니라 “지금까지 고마웠어요”라고 말하는 방식. 아쉽기만 한 이별이 아니라 환영하며 보내주는 이별도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끔은 누군가와 이별해야 그 사람이 드디어 자기 인생 2막을 연다는 걸. (물론, 나는 잠깐 관객석에서 눈물 좀 닦고 나와야 했지만)


꽃이 피고 지는 나무 옆에서, 계절 바뀌는 냄새를 킁킁 맡다가, 하얗게 얼어붙은 눈이 스르르 녹고 계곡물이 다시 졸졸 흐르기 시작할 때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건 내 컨트롤 범위 밖이구나.’

‘내가 쥐고 있을 게 아니었구나.’

영원히 내 곁에 머물 것 같던 것들도 딱히 나한테 상의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내가 할 일은 ‘붙잡기’가 아니라, ‘잘 가라’며 손 흔들어주는 일이라는 걸.

아쉽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래, 너도 너의 사계절을 잘 살아라” 말해주는 것.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 모습은 언젠가 또 돌아올 거고, 혹시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아름다움으로 다가갈 테니까.


아량 넓은 나는, 그 이별의 순간을 조금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다른 사람도 네 예쁜 모습 좀 봐야지.”

입꼬리 살짝 올리고, 마음 한 켠을 내어주는 선택.



…물론, 아직도 이별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다. 이별이란 건… 여전히 나에겐 업데이트 안 되는 기능이다.

‘쿨하게 보내기’는 늘 로딩 중이고, ‘미련 지우기’는 매번 오류 메시지를 띄운다. 버전 업이 안 되는 마음, 여전히 그대로다.


그래서 요즘도, 어쩌다 한 사람 생각에 울컥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울컥이 덜 민망했으면 좋겠다. 쿨한 척 “괜찮아“ 하며 돌아서다가, 눈물 때문에 말끝이 흐려지는 날들.


‘너와 함께해서 고마웠어. 우리, 잘 지냈다.’

미련이 아닌 마음으로, 조금은 단단하게, 그리고 여전히 따뜻하게 잘 보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별을 겪는 ‘나’를 덜 미워했으면 좋겠다.

‘왜 또 이렇게 유난이야…’가 아니라,

‘이 정도면 충분히 마음 써줬어’

하고, 나 자신을 다독이는 것. 그게 내가 요즘 배우고 싶은 ‘작별의 기술’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인연 앞에서도 마음을 조금 덜 조이고 싶다. 만나면 반갑고, 떠나면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잘 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사람도, 감정도, 그리고 언젠가 나 자신도..


오늘도 서툴지만..

그래도, 잘 ‘보내고’ 싶은 하루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