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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Jul 26. 2023

고추장물, 결핍과 창의력의 산물

 장마의 끝자락인가? 간간이 소나기처럼 비가 내리고 또 무덥기를 반복한다. 이런 날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시골음식이라고 해야 하나? 토속음식이라고 해야 하나? 어릴 때 먹던 시골음식들은 추억을 자극한다. 콩잎김치, 배추전, 무우전, 고추장물, 갱시기, 양재잎찜, 가죽순 장아찌나 가죽 부각 등 대부분 경상도 산골의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먹었던 음식들이다. 겨울에는 가장 흔한 배추와 무를 이용한 갱시기, 배추전 등을 많이 먹었고, 여름이면 지천에 나는 비름이나 콩잎, 호박잎, 양재잎, 고추 등이 모두 식재료였다. 그중에서도 이렇게 후텁지근한 날이면 칼칼한 고추장물이 생각난다.


 고추장물은 입맛 없는 여름에 밥에 비벼 먹거나 다른 음식에 고명처럼 얹어서 먹으면 입맛을 돋우는 경상도 지방의 여름 음식 중 하나다. 청양고추는 독하게 맵고 여름 햇볕을 받고 실해진 풋고추는 달게 맵지만, 청양고추나 풋고추를 듬뿍 다져 만든 고추장물은 감칠맛이 더해진 깊은 매운맛이 난다.


 어머니께서 시골 마당에 농약 없이 키운 거라며 청양고추 한 봉지를 싸주시며 씻어서 냉동실에 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먹으라는 하셨는데, 얼린 고추는 녹으면 뭉크러진다는 아내의 말에 그냥 야채통에 넣어 두었더니 냉장고를 열 때마다 청양고추가 신경이 쓰인다. 몇 주가 지나서 그냥 버리게 될까 걱정이 되던 참이라 고추장물을 만들어 둬야겠다며 판을 벌렸다.


 고추장물 만들기는 간단하다. 여러 조리법이 있지만 난 어릴 때 먹던 대로 멸치 우린 물에 국간장으로 간을 하고 다진 청양고추와 마늘을 넣고 끓이는 방법을 좋아한다.


 고추 다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안 된다는 당부를 들은 터라 비닐장갑을 끼고 곱게 다졌다. 많은 양을 만들어야 하는 식당이나 젊은 주부들은 주로 믹서기를 사용하지만 믹서기를 이용해서 다진 청양고추는 너무 무른 맛이 나서 직접 칼로 다졌다. 햇마늘도 한 통 까서 곱게 다져  두었다. 작은 냄비에 라면 끓일 정도의 물을 넣고 다랑어와 멸치, 후추, 다시마를 넣고 20분쯤 끓여 육수를 만든다. 여기에 멸치액젓, 국간장, 진간장의 적당한 조합으로 짭조름한 간을 해서 한소끔 끓어오르면 다져 둔 청양고추와 마늘을 넣고 한 번 더 끓이면 완성이다. 만들어 놓고 보니 물 양을 조금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국물이 좀 있어도 다른 찌개류에 국물을 조금 넣으면 천연 조미료의 역할을 하기에 괜찮다.


 고추장물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자식들은 다 객지로 보내고 노부부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는데, 한 번은 어머니가 경운기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병문안을 갔다가 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러 집에 가니 고추장물만 있으면 밥 해서 먹을 수 있으니 염려 말라고 하셔서 고추장물을 한 냄비 끓여 두고 서울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해외 출장을 다니며 우리나라 음식의 조립법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영국이나 유럽, 서양 음식의 단조로움은 제쳐두고라도 음식 종류가 다양한 태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도 우리의 음식은 사계절의 다양한 식재료만큼이나 조리법은 독특하고 다양하다.

 태국의 경우 다양하고 신선한 식재료에 고추, 마늘, 카레, 코코넛 등 풍부한 향신료 등이 더해져 훌륭하지만 그 조리법은 대부분 단순해 보인다. 일본도 신선하고 풍부한 식재료에 색과 맛과 모양에 따라 조화로운 장식을 함으로써 보는 즐거움까지 더해져 식사하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만, 재료별로 조리법이 대개 비슷해서 처음에는 일본 음식에 감탄하다가 빨리 싫증 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음식은 어떤가?


 흔한 고추만 해도 그 먹는 방법이 실로 다양하다. 고추야 조연으로 어디든 빠지지 않지만 주연으로도 여러 곳에 등장한다. 찬물에 밥을 말아 고추장이나 된장을 찍어서 아삭한 식감과 독하게 매운맛으로 먹을 수도 있고, 기름진 삼겹살 쌈을 먹을 때 적당한 크기로 잘라 함께 싸 먹어도 좋고, 고추전, 고추장떡, 고추장물, 땡초김밥도 있다. 꽈리고추는 밀가루를 입히고 쪄서 간을 해서 먹기도 하지만, 청양고추를 찌고 말려서 기름에 살짝 튀겨서 부각처럼 먹기도 한다.


 나물 요리를 할 때도 어떤 나물은 그냥, 어떤 나물은 쪄서, 어떤 나물은 데쳐서, 어떤 나물은 삶아서 말리고 다시 물에 불려 다시 푹 삶아서 기름에 볶아서 먹는다. 어떤 나물은 들기름으로 어떤 나물은 참기름으로 맛을 돋운다.


 같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지방마다 집집마다 각자의 고유한 방법들이 있어 음식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사계절의 재철 식재료의 다양성도 한몫했겠지만, 빈곤과 결핍이 우리 민족 특유의 창의력과 문제해결 역량까지 더해져 이런 다양한 조리법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고추장물도 이런 빈곤과 결핍의 산물 중 하나가 아닐까. 제철의 흔하디 흔한 고추와 어느 집이고 있는 장독대의 국간장을 더하면 쉽게 만들 수 있고, 무더위에 지친 몸에 칼칼한 자극을 주는 음식으로 효율성 좋은 착한 음식이다.


다진 청양고추와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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