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이 언젠가부터 나를 조용히 누르기 시작했다
오디오북 입니다 https://youtu.be/868hB73y0To
“정이 있으니까 그런 거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참 따뜻했습니다.
아, 나를 챙기려는 마음이구나.
괜히 혼자 뿌듯했고, 그래도 이 낯선 회사 안에
내 편이 하나쯤은 생긴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 말에 쉽게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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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했어요.
그 말은 자꾸만 내가 불편해질 때 등장했습니다.
일이 아닌 개인적인 부탁.
사적인 감정을 묵묵히 들어주는 역할.
주말이나 퇴근 이후에도 이어지는 요청들.
> “정이 있으니까 말하는 거야.”
“너라서 말하는 거야.”
“딴 사람한텐 이런 얘기 못 해.”
어느새 그 말은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의 족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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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거절했을 땐 이런 말이 돌아왔습니다.
> “아, 괜히 부탁했네. 너한텐 아직 정이 없나 보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정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내가 냉정한 사람, 선을 긋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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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말이, 나를 위한 걸까?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그 ‘정’이라는 말이
언제나 내가 무언가를 감당해야 할 때만 나왔다는 것을요.
따뜻한 말처럼 보였지만,
그 말은 나의 감정을 설득하고,
나의 시간을 데려가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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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라는 말의 오래된 풍경
예전엔 그랬죠.
정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도도, 시스템도 없던 때.
서로를 믿고 살아야 했기에
정은 관계를 잇는 필수적인 끈이었겠죠.
> “정 붙이고 살아야지.”
“정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그건 살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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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우린 각자의 역할이 있고, 경계가 있고,
존중과 분리가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과거의 정서를 지금의 틀로 끌고 오면,
그건 때때로
서로를 묶는 말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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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빌미로 선을 넘는 말
어느 날 점심시간,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
선배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 “이거 좀 도와줘.
너한테 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 말에 마음이 일렁였습니다.
> 진심일까.
아니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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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가온과의 대화
그날 상담실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가온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 “정이라는 건, 참 미묘해요.
잘 쓰면 마음이고,
잘못 쓰면… 경계를 넘는 무기가 되죠.”
그 말에, 숨이 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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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덧붙였습니다.
> “요즘 시대에서 정을 이유로 부탁하는 건,
상대를 위한 게 아니라
내 편의를 감정적으로 포장하는 걸 수도 있어요.”
> “그 부탁, 정말 정이 있어서 한 걸까요?
아니면, 당신이 거절하지 못할 걸 알아서 한 건 아닐까요?”
가슴 깊은 곳에서 철렁, 소리가 났습니다.
정확히 그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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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부탁받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도 단호하게 거절해 본 적 없는 사람
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정이란 이름으로 피로해져도, 웃으며 넘기던 사람
그러다 어느새
내 시간은 침범당하고
내 감정은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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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나만 일방적으로 받아주는 관계였고,
말은 따뜻했지만 실은 서서히 나를 갉아먹는 관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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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은, 이런 게 아닐까요
가온이 말했습니다.
> “진짜 정은요,
내가 편해서 부탁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힘들지 않을까 먼저 묻는 것이에요.”
그 말은,
내게 ‘정’이라는 말을 다시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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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실천해 보기로 했습니다
부탁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이렇게 말해봤습니다.
“지금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번엔 힘들지만, 다음에 도와드릴게요.”
“오늘은 제 시간이 좀 필요해요.”
놀랍게도,
상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전혀 어색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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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은 나를 지키는 언어였습니다
나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거절은 관계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
정이라는 말은
부드럽지만, 조심히 다뤄야 할 감정의 그릇입니다.
이제 나는,
누군가가 “정이 있으니까…”라고 말할 때,
조용히 내 마음부터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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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누군가를 묶기 위한 말이 아니라,
서로를 지켜주는 언어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