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한쪽 벤치에서 윤아가 친구와 웃으며 떠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은 똑같이 내려앉았고, 바람도 늘 불던 그대로였는데, 그 순간만은 이상하게 주변 공기가 달라 보였다.
이천재는 무심히 물을 마시려다 멈췄다. 자신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웃으려 한 적이 없었다. 계산된 것도, 필요해서 만든 표정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윤아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마치 반사처럼 마음이 간질거렸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런데… 기분이 좋았다.”
머릿속에서 기계적으로 정리하듯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곧장 노트를 꺼내 적었다.
‘윤아 = 뇌의 집중도를 흐리는 존재.
그녀의 웃음 → 나의 기분 = 상승.
원인 불명. 논리 오류 발생.’
하지만 그 문장은 기록이라기보다 항복에 가까웠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단순한 소리, 단순한 표정 하나가 자신에게 이런 파동을 일으키는지.
윤아가 손을 흔들며 친구와 장난치자, 이천재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돌아서려 했는데 발걸음이 묘하게 느려졌다.
“왜 자꾸 눈이 간섭받는가? 왜 그녀가 눈에 계속 걸리는가?”
뇌는 계산기를 돌리듯 수치를 찾았지만, 가슴은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박동을 이어갔다. 천재는 가만히 가슴께 손을 얹었다. 조금 전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생리적 반응인가, 아니면 감정인가?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까지 기록한 수많은 감정—분노, 미움, 공감—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감각이라는 것을. 낯설고 불편하면서도, 어째서인지 계속 붙잡히는 감정.
“나는 이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새로운 감정이다.”
노트 한 귀퉁이에 그는 굵게 적었다.
‘감정 이상 반응 발생. 정체불명. 분석 필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음을, 천재는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며칠째였다. 윤아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이천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걸을 때의 보폭, 자리에 앉으며 교과서를 펼치는 사소한 동작, 누군가와 대화하며 살짝 기울이는 어깨—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원래 사람을 관찰하는 데 익숙했다. 표정, 행동, 말투의 불일치를 기록하며 감정의 작동 원리를 찾는 게 습관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분석하기도 전에 시선이 먼저 붙잡혔다.
수업 중에도 이상 현상은 계속됐다. 칠판을 보아야 할 순간에도, 귀는 옆자리의 작은 웃음소리를 먼저 포착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집중하라. 방정식을 풀어라. 하지만 연필 끝은 허공에서 맴돌 뿐, 숫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 친구들이 다가와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야, 너 혹시 윤아 좋아하냐?”
순간,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뇌를 강타했다. “좋아한다”는 단어가 귓속에서 울리는 순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는 본능적으로 노트를 펼쳤다.
‘단어 반응 실험 결과: “좋아한다”라는 자극이 = 심박수 급등, 호흡 불균일.
의식적 부정 불가능. 논리적 해석 불가.’
천재는 펜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지금 느끼는 이 불안정한 에너지가 단순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감정일까?
“나는 그녀를 특별히 구별하고 있다. 그녀가 없는 순간과 있는 순간의 내 몸 반응이 다르다. 이것은… 좋아한다는 건가?”
말로 꺼내는 순간, 그 단어는 더 이상 남의 농담이 아니라 그의 것이 되었다.
심장이 빨라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원인도 알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감정, 그러나 확실히 존재하는 감정.
천재는 노트에 망설이며 적었다.
‘이름 붙임: 좋아함(가설).
논리적 정의 불가.
직관적 확신 발생.’
그는 펜 끝을 바라보았다. 글씨는 흔들려 있었지만, 글씨를 쓴 그의 손만큼은 더 이상 멈추지 못했다.
이천재는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결론은 단순했다.
“감정은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지금까지 감정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정의해 왔다. 하지만 정의만으로는 아무 일도 바뀌지 않았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달리, 감정은 자기 혼자 이해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알아야만 감정은 실체가 된다.
천재는 노트에 적었다.
‘감정 = 내적 반응 → 외부 전달 시 실체화.
전달 행위 = 고백.
고백 = 감정의 공식 발표.’
그는 결심했다. 표현해야 한다.
방과 후, 운동장 한쪽을 천천히 걸었다. 교실 창문에서 보았던 윤아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어 운동장 바닥에 긴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공 소리가 멀리서 울리고, 바람이 운동장 깃발을 흔들었다.
천재는 마음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는 내게 특별하다.”
“네가 웃으면, 나도 기분이 달라진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속 말은 분명하고 또렷했는데, 입술은 묘하게 무거웠다. 손끝은 차가워졌고, 땀이 배어 나왔다.
왜 이렇게 단순한 문장이 이렇게 어려운가?
논리로만 본다면, 정보 전달은 간단하다.
주어: 나.
서술어: 좋아한다.
목적어: 너.
삼단논법처럼 분명한 구조.
그러나 현실의 그는 운동장 모래 위에서 발끝만 긁고 있었다. 그저 그녀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가는 것조차, 숨이 막힐 듯 버거웠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정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천재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그는 알았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건 ‘정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용기를 내는 일이라는 걸.
운동장 구석, 벤치에 앉아 있던 윤아가 고개를 들었다.
늦은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며 금빛을 만들었다. 천재는 그 순간, 모든 계산이 무의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이다.”
심장은 규칙을 잃은 메트로놈처럼 불규칙하게 두드렸고, 손바닥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발자국마다 모래가 바스락거렸고, 그 작은 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마치 온 운동장이 그의 심장 박동에 귀 기울이고 있는 듯했다.
“윤아.”
입술 사이로 간신히 이름이 흘러나왔다.
윤아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응? 무슨 일 있어?”
이천재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분명 수십 번 시뮬레이션했던 그 문장이었는데, 목구멍은 뻑뻑하게 잠겨 버렸다.
목이 바싹 말라서 침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손끝은 가늘게 떨렸고, 시야가 흐려졌다.
논리적 언어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감정은 마치 입구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길을 찾지 못했다.
윤아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물었다.
“뭐 말하려던 거야?”
천재는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선택지를 계산했다.
지금 고백한다 → 위험. 관계 붕괴 가능성.
하지 않는다 → 감정은 계속 내 안에서만 맴돈다.
다른 말로 회피한다 → 당장은 안전하다.
그는 결국 세 번째 선택을 택했다.
“… 괜찮습니다.”
짧은 말.
그는 곧장 몸을 돌려버렸다. 마치 도망치듯 운동장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아는 잠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천재는 멀어지면서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나는 왜 말을 못 했는가?
나는 수학 문제도, 복잡한 논리도 풀 수 있었는데, 단 네 글자조차 꺼내지 못했다.
심장은 여전히 요동쳤고, 그 떨림은 더 이상 설렘이 아니라 자책의 진동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천재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책상 위 노트를 펼쳤다. 늘 그렇듯, 감정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글로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펜을 쥔 손마저 덜덜 떨려 글씨가 삐뚤어졌다.
그는 먼저 사실을 적었다.
감정 발생: 윤아와 마주할 때, 심장 박동 증가.
감정 명명: ‘좋아한다’라는 단어에 강하게 반응.
행동 시도: 운동장, 고백을 위해 접근.
결과: 발화 실패. “괜찮습니다”라는 회피성 발언.
그리고는, 한참 동안 펜촉을 종이에 누른 채 멈춰 있었다. 아무리 항목을 나열해도 이번에는 이유가 드러나지 않았다.
“왜 나는 말을 하지 못했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논리적 설명을 찾으려 했다.
신체적 현상: 심장 박동↑, 손 떨림, 구강 건조 → 불안 반응.
원인: 부정적 결과 예상? 관계 단절 위험?
그러나 이 계산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나는 언제나 논리로 움직였다. 그런데 오늘은 논리가 나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논리를 넘어선 어떤 벽이 있었다.
그 순간, 천재는 서늘한 깨달음을 얻었다.
“감정은 이해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감정은 행동을 요구한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순간, 나는 내 감정을 상대에게 건네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
그건 위험했고, 동시에 용기가 필요했다.
천재는 펜을 들고 다시 적었다.
감정 표현 = 지식 전달 X
감정 표현 = 자기 노출 + 용기
노트를 덮으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겁이 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책이 아니라, 새로운 정의였다.
감정을 말로 꺼낸다는 건,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이천재는 노트 맨 끝 장에 굵은 글씨로 제목을 적었다.
감정 관찰 보고서 20호
그는 숨을 고르고, 마치 실험 기록을 남기듯 차근차근 써 내려갔다.
1. 관찰 사실
나는 오늘, 윤아에게 고백을 시도했다.
심장은 빨라졌고, 손은 떨렸으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고백은 실패했다.
2. 감정 반응
고백 직전: 긴장, 두려움, 설렘.
고백 실패 후: 좌절, 수치심, 공허감.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감정을 강렬하게 ‘살아 있다’고 느꼈다.
3. 분석
감정은 인식(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표현(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의 실체는 내부 감지가 아니라 외부 표현에서 완성된다.
4. 결론
감정을 말한다는 건 곧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다.
자기 노출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감정 표현에는 용기가 필수적이다.
마지막 문장은, 천재답지 않게 계산식도 도표도 아닌,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남았다.
“감정을 말로 꺼낸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한동안 보고서를 바라봤다. 오늘은 분석보다 그 문장 하나가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낭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드디어 깨달았으니까.
감정은 단순히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보일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