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근원은 미운 너였다 22화

아무 말 없이도 미안해지는 날이 있다

by 공인멘토
ChatGPT Image 2025년 12월 3일 오후 11_47_46.png


1절. 오늘따라 그 사람이 떠오른다


이상한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특별한 자극도 없었는데
문득, 진짜 문득—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연도 없고,
연락할 이유도 없고,
그 사람의 현재가 어떤지 궁금해할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그 사람이 자꾸 떠올랐다.
어떤 냄새, 어떤 빛,
스치는 말투 하나에도
그때의 장면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아팠던 기억도 아니고,
격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작은 파도처럼 가슴 안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하필 오늘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사람을 떠올리는 지금의 내 마음은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는 것.


그 사람을 생각해도
이젠 가슴이 뜨겁게 욱신 거리지 않았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거나, 서러운 감정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말을 꺼낸 건 그 사람인데
돌이켜보니,
그 말에 대답했던 내 말투도
상처가 될 만큼 차가웠음을 기억했다.


그날의 나는
상처를 막기 위해 벽을 세웠고
그 벽 너머로 건넨 말들은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걸 ‘당연한 대응’이라고 생각했었다.
아파서 그런 거라고,
그 사람 때문이라고,
내 잘못은 없었다고.


그런데 오늘,
그때의 나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때 그 사람도
나의 차가움 앞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오랜 시간이 지나
오늘에서야
나에게 가만히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무 말도 없는 하루 속에서,
문득 이런 마음이 되었다.


“괜히… 미안해지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나 때문이었다.



2절.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너무 차가웠다


그때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던졌던 말,
그 말투, 그 표정, 그 무심함—
그 모든 것이 당시의 나에게는 정당했고, 당연했고,
오히려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정도였다.


그날의 내 말은
날카로운 것도 아니었고,
크게 쏟아낸 것도 아니었지만
‘차갑다’는 말이 가장 잘 맞는 말투였다.


온기가 없었다.
심장이 없는 문장처럼,
감정의 결을 일부러 잘라낸 말들이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상대에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 감정을 얼려서 던지는 방식.
아프지 않기 위한 방어였고,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오랫동안 나에게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뭐 틀렸어?”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지지했다.


그런데 오늘,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른 그 얼굴과 함께
그때 내가 던졌던 말들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문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말을 꺼내던 내 마음의 온도였다.


억울함, 서러움, 분노, 실망…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


그 사람의 표정이 어땠는지
그 순간 어떤 마음이었는지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받은 상처만 크게 보였고
그 사람도 나처럼 아플 거라는 단순한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힘들었어’라는 말 뒤에
그 사람도 어쩌면 같은 마음이었다는 가능성을
나는 아예 지워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감정의 먼지가 조금씩 내려앉고 나서야
그 장면 속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날의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아니라—
상처받았다며 상처를 되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걸 인정하기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나는 억울했지만,
그 사람도 억울했을지 모른다.
나는 차가웠지만,
그 사람도 무너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때는 그 사실을 볼 여유가 없었다.
내 감정만 겨우 붙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른 그 모든 장면이
날카롭지 않은 방식으로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때의 나는,
정말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생각만으로도
조용히 가슴이 저릿했다.



3절. 나 역시 결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준 상처만 바라보았다.
그의 말, 그의 표정, 그의 무심함,
그 모든 것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 사실만을 기준 삼아
그를 판단하고 미워하고 멀리했다.


하지만 오늘—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 안에서 하나의 진실이 떠올랐다.


나도… 결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분명 나에게 상처를 줬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상처에 상처로 반응했다.
말로 찌르는 사람에게
말로 되갚아주는 방식으로
내 마음을 보호하려 했다.


그때의 나는
‘방어’라고 믿었다.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나를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든 말과 행동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자
내 감정을 덮기 위한 억센 갑옷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받은 말을 곱씹으며
그 사람을 원망했지만,
정작 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내 말투가 얼마나 차가웠는지,
내 표정이 얼마나 닫혀 있었는지,
내 행동이 얼마나 상대를 밀어냈는지—
그걸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늘 ‘피해자’의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그런 구도로만 관계를 이해했다.


하지만 오늘,
그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니
이상하게도 그 구도가 흔들렸다.


그가 내게 상처를 준 것은 맞지만,
나 역시 그에게
부드럽지 않은 마음을 돌려주었다.
그의 거친 말투에
나는 더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고,
그의 무심함에
나는 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때 나는 몰랐다.
상처받은 사람이
그 순간 누구보다 날카로워질 수 있다는 걸.
내가 한 말들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상처를 더 키웠을지 모른다는 걸.


오늘 떠오른 미묘한 미안함은
그 사람에게 하는 미안함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때의 나를 보며 드는 미안함이었다.


내가 더 다정할 수 있었던 순간들,
내가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던 순간들,
그때 잠시 멈추어 상대를 바라볼 수 있었던 선택들…


그 모든 가능성을
나는 감정에 밀려 놓쳐버렸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쩌면 오늘에서야
그걸 제대로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었지만,
상처를 되갚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양쪽을 모두 바라보는 순간
나의 마음 한쪽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완전하진 않았지.”
“나도 내 방식대로 서툴렀지.”


이 고백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 감정 속에서
자리를 찾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늦은 미안함의 시작이었다.



4절. 이제는 사과할 기회도 없다


생각해 보면,
이제 와서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할 기회는 없다.


서로의 번호는 이미 사라졌고,
SNS에서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어렵게 마음을 정리했던 시절을 지나
각자의 삶은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 사람에게 연락할 이유도 없고,
연락한다고 해서 받아줄 이유도 없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이미 우리 둘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런데 그런 관계의 끝에서
낯선 감정이 조용히 떠올랐다.


“그때… 미안했어.”


이 말은
그 사람에게 건네는 사과가 아니다.
그 사람에게도 도달하지 못할 사과다.
그냥 마음속에서 아주 천천히 만들어진
늦은 감정의 문장일 뿐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다시 말을 걸 용기도 없고,
굳이 말을 건넬 필요도 없지만
이 마음만큼은
나 혼자라도 조용히 인정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너무 아팠고,
그래서 너무 차가웠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없을 만큼
서툰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지금에서야
그때의 나를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오늘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밖에 할 줄 몰랐어.
그래도 미안했어.”


이 늦은 사과는
그 사람을 위한 사과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를 위한 사과였다.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되돌려주는 방식밖에 몰랐던
어리고, 흔들리던 나를 향한 사과였다.


그리고 그 고백이
이상하게 나를 조금 더 가볍게 했다.


사과란
상대에게 건네야만 사과가 아니라—
내 마음에 도착하는 순간도 사과일 수 있다는 것.


나는 오늘에서야
그걸 알게 되었다.



5절. 아무 말 없이도, 미안한 날들이 있다


사과는
상대에게 닿아야만 의미가 있는 줄 알았다.
말로 꺼내고,
표정으로 보여주고,
행동으로 증명해야만
진짜 사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이 늦은 미안함이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말로 전하지 못해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사과가 있다는 것을.


그날의 나는 너무 어렸고,
너무 서툴렀고,
내 감정만 붙들고 있어서
누군가의 마음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 사람도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나도 결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조용히 인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미안함은 말보다 먼저 마음에 도착했다.


용기는 없었다.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
그 사람에게 닿을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었다.


가끔은
전하지 못한 사과가
전한 사과보다 더 진실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 미안함은
상대에서 출발한 감정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자란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과란
상대의 용서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과 다시 이어지고 싶지도 않고,
과거를 되돌리고 싶지도 않다.
그저 마음속에서
그때의 나와 그때의 그 사람에게
아주 작게, 아주 조용히 말해보고 싶었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네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이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말이지만
이제야 내 안에서
제자리를 찾은 문장이다.


시간이 흘러서야 도착한 감정들은
대체로 천천히, 그러나 깊게 마음에 스며든다.


오늘의 나처럼.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도 미안해지는 날이 있다.
그 마음이 닿지 않아도,
전해지길 바라지 않아도—
나에게는 그게 충분히 사과였다.”


그리고 그 사과는
내 삶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며
오늘을 지나
내일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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