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_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고, 들뢰즈에게로
철학은 언제나 어렵다.
개념은 낯설고, 문장은 단단하며, 읽고 나면 머릿속에 안개가 남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에서 놓이지 않는다.
아마 철학은 이해되는 지식이기 전에,
사유를 요청하는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에서 아주 정직한 책이다.
철학을 쉽게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왜 철학이 지금도 필요한지를 설득한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단순한 철학사의 나열이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거쳐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구조주의 이후의 사유까지.
그 흐름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 우리는 ‘나’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근대 철학은 ‘나’를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생각하는 주체, 인식하는 자아, 판단하는 이성.
세계는 나의 인식 안에서 질서를 얻고,
진리는 나의 사유를 통해 포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믿음이 얼마나 치열하게 흔들려 왔는지를 보여준다.
니체는 진리를 의심했고, 마르크스는 의식의 조건을 드러냈으며, 프로이트는 나 자신조차 내가 모른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단단한 중심이 아니게 된다.
철학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철학이 단순히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알고, 존재를 알고,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
그 아름다움은 정답을 아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할 수 있게 되는 힘에서 온다.
그 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유독 마음이 기울었던 이름이 있다.
바로 들뢰즈이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내가 니체를 오래 좋아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불변하는 진리보다 살아 있는 삶을 택한 철학자였다.
존재를 정의하지 않고, 존재가 얼마나 강하게 살아지는가를 물었다.
들뢰즈는 바로 이 니체의 사유를 가장 철저하게 이어받은 철학자다.
그래서 그는 불변하는 것보다 변이에 주목한 니체주의자다.
들뢰즈에게 철학은 존재를 규정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는 실존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보지 않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말하는 차이는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말도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다양성을 보존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들뢰즈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만들어지는 차이’다.
나는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다른 무언가를 만날 때마다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존재다.
타자와의 만남은 나를 위협하는 사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형될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차이란 정체성의 붕괴가 아니라,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다.
이 사유는 중년의 삶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중년 이후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경력도, 역할도, 삶의 방식도 어느 정도 정리된다.
하지만 바로 그때, 삶은 굳어지기 쉽다.
“나는 이제 이런 사람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들뢰즈의 철학은 이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춰 서게 만든다.
그는 묻는다.
“아직 무엇이 가능한가?”
“무엇과 만나면 당신은 다시 달라질 수 있는가?”
들뢰즈 적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건 아주 다른 태도다.
정체성 대신 능력을 묻는 삶,
완성 대신 변형을 허용하는 삶,
목표보다 조건을 설계하는 삶이다.
삶을 하나의 결론으로 닫지 않고,
열려 있는 구조로 남겨두는 태도.
괜찮아질 필요는 없다.
다만, 멈추지 않으면 된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고
나는 철학이 여전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나를 위로하지는 않지만,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나는 들뢰즈라는 철학자와 조용히 결이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삶을 고정하지 않고 여전히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