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흐릿했던 날씨는 기어이 비를 뿌려대고 만다. 내 마음만큼이나 먹구름도 버텨내기엔 힘에 겨웠나 보다.하늘은 그렇게속시원히 쏟아내며 하얀 구름으로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건만,아무리토해내도 비워지지 않는 설움에 내리는 비마저 야속하다. 매번 힘든 결정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요양원 간호팀장님께서 위로의 전화를 주셨다. "자부님, 힘드시지요". 그 한마디에 설움에겨웠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팀장님의 그 위로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끝도 없이 울게 만들었다. 연일 계속되는 태풍으로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도 내 명치끝에 걸린 당신의 목숨줄만큼은끝끝내 놓을 수 없음에 눈물이 비가 되어 줄줄 흘러내렸다.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꺼져가는당신을 미련스럽게 부여잡고 있다는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해도 달게 받을 것이다. 결코 놓을 수 없음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 할 것이다. 당신의 삶에 연장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 더없이 애처롭다 해도 결코 쉽사리놓을 수가 없다. 부디 당신과 함께해 온 나날들이가벼이 여겨지는 일만은내 앞에서 일어나지 않아야한다.그래서두 번이나 하늘의 뜻을 거부하며수혈을 허락하고지금까지 어머니를 지켜왔다.
22년 추석 무렵 갑작스레 혈압이 떨어지고 정신을 잃어가는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었다. 바로 조치가 필요해 119를 불러 인근 병원으로 먼저 출발하고 우리도 바로 뒤 따라가 병원 응급실 앞에서 어머니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몽사몽인 듯 기억은 뒤엉켜 횡설수설하시고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시기라 절차도 복잡하여 진료도 못 보고 119 응급차 안에서의 시간만 흘러갔다. 그 사이에 어머니는 더 깔아지시고 뭘 어찌해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리 링거를 쏟아부어도혈압은 잡히지 않았고 각종 검사 끝에 패혈증으로 수혈을 하지 않으면 어느 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했다.
이미 몇 해 전에 연명치료거부사전의향서에 사인을 했지만 막상 그 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어느 자식이 당장 이걸 하지 않으면 영영 못 본다 하는데 그걸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추석은 다가오는데 비바람 몰아치는 태풍예보로 모든 상황들이 어수선하였지만어머니가염려되어 형제들이 응급실 앞에 모두 모였다. 그렇게 자식들의 기도 속에서 어머니는 한 달 정도의 치료 끝에 어느 정도 회복되어 경관식이법으로 연명하며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때도 오래 버티시지 못할 거라 했지만, 어머니의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가 오늘을 살아내게 하셨다.
이것으로 끝이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의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병인과의 문제였다. 그때는 코로나19로 응급실조차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상황으로 119에서 애써주신 덕분에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 응급실로 갈 수 있었다. 보호자 또한 1인이 들어가 교대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간병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분께만 맡겨둘 수 없어 조석으로 전화를 드려 어머니 상태를확인하며 잘 부탁드린다고 연신 굽신거려야 했다. 며칠이 멀다 하고 떨어진 물품을사다 드리며 간병인 간식도 꼬박꼬박챙겨드렸다. 낯선땅에서 나이 드신 분이 어머니를 돌봐주시니 깍듯하게 대해드렸다. 그럼에도 마지막 비용정산에서 문제가 되었다. 어머니께서 몇 차례 병원입퇴원을 하며 간병인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기에 연결해 준 센터와 정산을 끝내려고 했지만 입금은 그분께 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간병인께 센터와 계산된 비용을 입금해 드리고 그렇게 끝이 난 줄 알았다. 센터에서 추석연휴는 배의 비용을 요구하여 그렇게 드리고도 수고비를 더 얹어 드렸는데 그분께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들이 난무했다. 그러지 않아도 어머니께서 좋지 않은 상태로 퇴원하시고 내 몸도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그 자리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제부모하나도 제대로 못 돌보고 남에게 맡긴 것들이 무슨 자식이냐며 아픈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결국은 돈을 더 많이 안 주었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렇게 내 앞에서 어르신은 걱정 말라며 드리는 간식들을 냉큼 받아가며 공손하기만하던 그분이 아니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길래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하는지,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지. 이런 상황들이 너무 싫고 아픈 어머니 마저 원망스러웠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전화를 끊은 것이 더 원통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센터에 전화를 걸며 엉엉 울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떻게 이런 분이 있을 수 있느냐며 뒤늦게 울분을 토해봤자 이미 받은 상처는 지울 길이 없었다. 센터에서는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해댔지만 그날의 그 상처는 지금도 내 입술을 깨물게 한다.
요양병원 주치의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속되는 식사거부로 경관식이법(콧줄식사)을 또 결정해야 했다. 아무리 모진 인간일지라도 당신이 거부하는 식사를 억지로 집어넣어야 하는 행위를 허락하면서마음 아프지 않을 자식이 어디에 있을까. 그때도 그랬지만 친정어머니를 그렇게 보내드리고 채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난 또 그런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잔인하고 서러웠다.
갑자기 달려드는 긴 줄이 강제로 콧속을 뚫고 쏟아내는 유동식에 힘겨워하실 것이 뻔함에도, 그리할 수밖에 없음에 또 죄를 더하게 된다.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다 뽑아대고 몸부림치실 것임을 알기에 장갑 속에 당신 손을 억지로 꼭꼭가두어 놓아도 어쩔 수 없음에 또 죄송스러울 뿐이다. 그럼에도38년 세월의 정을 그리 쉬이 놓을 수 없어 또 피하고만 싶었던 결정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빗물인지 눈물인지를 쏟으며 대학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스럽다는 말로는 더없이 부족하지만,5%의 암 확률을 과감히 뿌리치고 도려낸 조직검사결과는 내게 감사함을 안겨주었다. 그것이 암인지 아닌지 말해달라는 남편의 간절함에도 의사 선생님은바로전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암으로 판정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며 정확한 진단은 조직검사를 해야 알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일과 겹치며 나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더없이 좋은 이런 결과 앞에서 마음껏 기뻐해야겠지만 그러질 못했다. 다만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 또 빗물인양 눈물만 하염없이 흘려야 했다. 걱정해 준 가족들이 고맙고 미안하고 감사함에도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이제 어머니는 지난해와 같은 우리의 선택으로 힘든 그길을 또가실수밖에 없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친정부모님을 보내드리며 뼈저리게 느껴온 시간들이었기에 더 많이 아프고 괴롭다. 두 분도 마지막까지 경관식이법을 하시다 가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과 함께 가는 마지막길이 될지도 모르기에 이렇게 눈물 쏟으며,이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천명이라 여기며받아들이자고 나를달래 본다. 부디 오늘밤만은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