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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레비엔 Jul 30. 2024

무명작가의 소개

 무명의 이름 - 6 번째 수업       

한주 잘 지내셨나요글쓰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이제 벌써 7월이고 오늘이 벌써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글 쓰니까 시간 금방 가죠다들 많이 쓰셨나요?”


한미숙 작가는 첫 시간에 비해서 한결 여유롭고 친근해져 있었다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우리는 부지런히 글을 쓰지 못한 것에 조금씩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기는 했지만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책 쓰기 수업은 점점 무게가 무거워져 갔다예비 작가들은 마음의 짐을 지고 슬슬 굼떠지기 시작했다지난 시간부터 한두 명씩 빠지기 시작해서 오늘은 몇 명이 더 안 왔다


처음에는 나는 그래도글을 괜찮게 쓰겠지.’ 하는 기대와 그동안 간직해 온 꿈을 이룰 원대한 계획으로 시작했으나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일어린 시절부터 무엇인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되고 싶었던 작가노인이 된 미래를 상상하면서 당연히 인생을 돌아보며 써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서전그런 것들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을 책을 쓰다 보면 알게 된다중요한 일은 가족을 위해 기계처럼 끊임없이 돈을 벌어오는 일이었으며언제나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끼니를 차려내는 것이고밀린 청소를 끝내는 일이고간만에 만나기로 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글을 쓰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었고더 중요한 일에 밀려글쓰기는 쉽구석으로 쉽게 밀어버렸다


그러나글을 쓰기 시작하면 금세 스스로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하루 중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얼마나 썼던가인생에서 진정 나를 위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분간을 하고 살았던가

회사에서집에서친구들 사이에서 배려하고 노력하는 만큼스스로에게 묻고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본적이 있는가를 묻게 된다어떤 글을 쓰든 간에 덮어 두었던 마음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은 그렇게 자신과 만나는 과정이었다. ‘어떤 글을 쓰는가와 상관없이 책 쓰기 수업에 참여하는 우리들은글을 쓰면서 각자 자신과 대면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심지어 남의 책을 베껴 쓰고 있는 강사랑 조차도.

글을 쓰는 동안 낯선 자신을 마주하게 되다가도 현실의 무언가가 끼어들면글쓰기는 당장이 아니어도 되는 하찮은 취미생활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책 쓰기 수업이 진행될수록 한미숙 작가는 점점 가벼워지고우리는 점점 무겁게 짓눌려갔다그 어느 때 보다 편안한 얼굴로 명랑하게 한미숙 작가는 수업을 시작했다

두 달 안에 원고를 다 쓰셔야 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죠두 달 안에 원고 완성 못 하시면그 원고는 영원히 서랍 속에서 잠자게 됩니다우리 글쓰기가 돈 받고 글 쓰는 프로들보다 더 힘듭니다우리도 돈 받으면 그분들처럼 잘 쓰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완성해 낼 겁니다맞죠?”

맞아요잘 쓸 수 있어요

오랜만에 정적을 깨고 누군가 대답을 해서 다 같이 웃었다

돈 받으니까 회사에서 하기 싫은 일을 잘 해내고 있는 거잖아요. ”

맞아요!ㅎㅎㅎ ” 

이번에는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우리 책은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누가 돈을 주지도 않아서완성하기 쉽지 않습니다여기 계신 모든 분들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신 거예요책을 완성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습니다그렇기 때문에칼을 뽑았을 때 완성하셔야 합니다아셨죠?”   

다섯 번째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시작할 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이내 조용해지면서한미숙 작가가 홀로 설명하는 외롭고 바쁜 한 시간이 여느 때처럼 계속되었다.  

         

이번 주 과제는 작가 소개를 쓰는 거예요경력을 위주로 쓰셔도 되고요실용서 아닌 분들은 자신의 스토리를 쓰면 됩니다

우리는 사실 무명작가도 아니잖아요일단 무명이라도 작가가 먼저 된 다음에 무명을 벗어나려면우리를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니까 작가 소개를 써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만 꾸고 살 것 같던 한미숙 작가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능청스러운 판매사원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한미숙은 세상살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작가라는 이름을 주는 것도 우리 자신이고요이름을 알리는 것도 작가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니까요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 책을 쓰게 됐는지책을 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작가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를 쓰셔도 됩니다저희같이 이름이 없는 작가일수록책 안에 작가를 소개해서힘들게 만난 독자에게 우리를 각인시켜야 하기도 하고요독자들도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책을 이해하는데 힌트가 됩니다감정적으로 작가에 공감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     

어릴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재밌게 읽었어요책날개에 작가가 짧게 소개되어 있었는데은둔의 작가로 사진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했던가그렇게 쓰여 있던 것 같아요. 10대가 보기에 그냥 멋져 보였습니다


책을 읽기도 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반해버렸고당연히 책도 재밌었죠어른이 돼서 보니까 개미가 데뷔작이라서 설명할만한 이력이 아마 없었던 것 같아요요즘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국에서 북 콘서트도 잘하고 절대 은둔의 작가는 아니더군요실망해서 팬심이 사라져 버렸습니다ㅎㅎ

잘 쓴 작가 소개 한 줄은 내 책을 호의적으로 바꿀 수도 있으니까 꼭 써보시면 좋겠습니다부담 없이 자유롭게 쓰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미숙 작가는 다시 평소의 어리숙하고도 사교적이지 못한 뚱한 표정으로 돌아가면서 다섯 번째 시간을 끝냈다     


작가 소개라’, 학력과 소속 말고 나를 소개하는 방법이 있던가소속이 없으면 성산시에 사는 누굽니다.’ 하면서 사는 지역으로라도 소개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인데그것을 빼고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거짓말 없이 나를 소개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지 알 수 없었다


한때 국내 최고 기업의 아너 그룹에서 30대 임원으로 빠르게 승진했으나정신 건강이 나빠진 것으로 오해받아 사임한 뒤 지속적으로 사업에 실패하다가 이제 통장에 60만 원만 간신이 남아 작가가 되기로 했습니다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나를 소개해야 하나자신을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거짓으로 덕지덕지 분칠을 해서나를 소개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렇다고 진실되게 부끄러워지기도 싫었다

갑자기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워졌다저 문장 속에 내가 있기나 한 것일까아너 그룹임원미친실패, 60만 원 이러한 단어들이 나였던가이것들을 빼면 내가 없을 것만 같았는데이 단어들 안에 나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나던 여자친구의 질문이 떠올랐다마음을 듣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었는데느낌으로 알아챘었던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었다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저녁에 가벼운 데이트를 위해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빠 뭐 먹을래?”

평소처럼 여자친구의 마음을 재빨리 듣고는 그녀가 딱 원하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여자들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아주는 좋은 남자는 세상에 없다.

스테이크 대신에 폭립 하나 시키고파스타 하나랑 맥주 마실래?”

오빠는 어떻게 내 맘을 잘 알아꼭 생각을 읽은 것처럼 우리 입맛도 똑같다그렇게 시키자.”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고 한강 변으로 나와 산책을 하면서 여자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오빠는 무슨 색 좋아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럼 지금 생각해 봐무슨 색이 제일 마음에 들어?”

왜 묻는지 알고 싶어서 여자친구의 마음을 들었으나이번에는 정말 무얼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서 여자친구가 떠올리고 있던 좋아하는 색을 대답으로 내놓았다.


주황색뭔가 달콤하잖아.”

오빠는 정말 사람을 잘 읽는 것 같아주황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잖아주황색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거든오빠는 언제나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주는 사람 같아사람들 생각이나 감정도 잘 읽고 똑똑하고다정하지그런데 오래 만날수록 오빠 문제가 뭔지 알아?”

내가 여자 마음을 모른다면세상에 여자를 이해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여자들은 마음을 듣지 않아도 영혼을 꿰뚫어 보는 또 다른 감각을 가진 존재들 같았다

문제내가 뭐 잘못한 거야 오늘저녁 메뉴도 눈치껏 잘 골랐는데.” 


오빠는 오빠가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는 거야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채지만점점 시간이 갈수록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그냥 나한테 잘 맞춰주는 사람 같아.”

너니까 맞춰주는 거야.”

마음을 듣는 것도 소용없어지자적당히 대답하면서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기만을 바랬다

너무 잘해줘도 문제다그렇지?, 가끔 오빠는 내 마음을 100프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을 때가 있어서그냥 물어봤어.”


주변은 깜깜했고멀리 도심이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사람들은 산책하거나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쳐갔다세상에서 우리 둘만 멈춰있는 것 같았다진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할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눈빛만 겨우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 무모한 확신에 차서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고백했다결혼까지 생각한 사이였고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여기다가진심으로 받아들이고도 한참을 함께 했다마지막으로 만난 날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우리 관계는 공평하지 않았던 것 같아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이제 다른 사람 마음 그만 듣고오빠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생각해 봐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부터.”        


작가 소개를 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는 잊었던 그 질문이 기억났다나에게서 아너 그룹성공실패남성 같은 단어를 빼고 나면남는 것이 없다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은 다 말할 수 있지만아직도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글을 쓰는 것은 항상 마지막 여자친구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얀 노트북 화면과 커서가 매 순간 질문을 던졌고항상 정곡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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