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움직이는
천도복숭아 체험관에서 동네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나 걸린다. 다시 한 시간이나 강사랑과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이명수 씨 참 다정한 아빠 같아요. 그런데 산재로 눈이 잘 안 보이게 되셨다니 안되셨어요. 얼마나 안 좋으신 걸까요? 전 정말 눈치 못 챘거든요”
강사랑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출발했다.
“오늘 혜인이가 안 왔으면 저희도 재미가 없었을 것 같네요.
혜인이 덕분에 저희까지 재밌게 놀다 왔네요.”
화제를 바꾸면서 대답했다.
마음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심장 같은 것이다.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없고, 산에 오른다고 지금부터 빨리 뛰자고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의 심장마저 정복한다. 원할 때 원하는 속도로 뛸 수 있도록, 평소에 좋은 것을 먹고 운동하면서 심장을 지배한다.
마음을 지배하는 일도 같다. 마음은 심장보다 더 제멋대로라서 남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과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마음이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어려운 사람들을 동정하다가도, 어려워진 이유가 자업자득일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더 못됐다면서, 생각하지도 않은 못된 마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래서, 심장을 지배하려 노력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마음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강사랑은 이명수와 혜인이의 하루에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사실만 마음에 담았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얼굴에 점이 있으면 점만 보고, 흉터가 있으면 흉터만 본다. 평범한 것들 사이에 오점은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한다. 강사랑과 나는 똑같이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명수가 눈이 나쁘다는 것을 고백한 밤에 나도 누가 더 절망적인가를 재다가 잠을 설치고 말았던 것이 기억났다. 좁은 차 안에 어리석은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답답하게 느끼던 차에 강사랑이 말했다.
“돌아갈 때 안 바쁘시면 해안도로로 돌아서 가도 될까요? 저는 차도 밀리고 해서 항상 그렇게 가거든요. 가면서 비밀장소도 보여드릴게요. 이 동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좋은 곳이 정말 많아요.”
“시간 괜찮습니다. 그러시죠.”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주제에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그나마 강사랑은 자신만의 해법을 가진 조금 나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탁 트인 바다 풍경에 마음을 씻을 필요가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편의점 앞에서 차를 세웠다.
“저희 저 앞에서 커피 마시고 가요. 오늘 오전에 업무 마치고 나온다고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이 없었거든요.”
편의점에서 얼음이 가득 담긴 컵에 시원한 커피를 사서 해안도로 아래로 난 샛길로 들어섰다. 작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자 탁 트인 바다 앞에 등대까지 향하는 오솔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빨간 등대까지 걸어가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등대 앞 좁은 계단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았다.
“여기 좋죠?”
“네 좋네요.”
“여기 사람들 잘 모르거든요. 남자친구랑 오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는 같이 안 오게 되더라고요. 결혼하셨어요?”
“안 했습니다.”
“죄송해요. 그냥 이 등대에 남자친구랑 오고 싶은 생각을 하다 보니까 부인분이나 여자친구랑 오시라고 하려다 가요.”
“아닙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강사랑은 이곳을 정말 사랑하는 듯했다. 평소와는 풍기는 분위기마저 달라져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도시도 좋고 쇼핑도 좋고, 사람 많은 데가 좋아서, 시골에는 잘 안 맞아요. 강아지들을 사랑해서 시골에 살아야 하지만요. 그런데 여기는 좋아요. 제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남자와 오픈카에 강아지를 태워서 여기서 산책하는 게 제 로망이에요.
부끄러운 것, 숨길 것 하나 없이 마음속 좋고 나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랑 완벽한 풍경을 같이 보고싶어요. 그래도, 꼭 오픈카를 타고 와야 하죠. ㅎㅎ 사실 아름다운 풍경도 여유가 있어야 보이는 거니까요. 웃기죠?”
“아닙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마음을 들어주는 부자 대신에 나랑 와있는 게 좀 웃기네’
강사랑은 이내 책에 대해서 물었다.
“책 많이 쓰셨나요?”
“아니요, 저는 이제 겨우 도입부만 좀 썼습니다.”
왜 책을 쓰면서 양에 집착하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책 쓰기 수업을 듣는 사람들끼리는 ‘많이 쓰셨냐?’는 말이 인사가 되어버렸다.
“저는 벌써 반쯤 썼어요. 지금 한 6만 자쯤 쓴 것 같아요.ㅎㅎㅎ 부러우시죠? 내용도 제가 봐도 너무 괜찮아요.”
당연했다. 강사랑은 첫 시간에 만날 때 혼자 생각한 것처럼, 원서를 착실하고 영리하게 적당히 베껴서 쓰고 있었다. 안 그랬으면 벌써 책을 다 썼을 테지만, 속으로 유명해질 때를 대비한다면서 귀찮지만 꼼꼼하게 자신의 책으로 만들면서 쓰고 있었다.
“지금 한 반쯤 쓴 것 같은데,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걱정이에요. 제가 「한국 반려견 교육 문화 센터」 운영하는 것 알고 계시죠. 그래서 이번에 책을 잘 써서, 출판사에 보내보고, 출판사에서 관심 없으면, 제가 제작해서 여기저기 돌릴 거예요. 제가 쓰는 책이지만, 반려견 키우시는 분들한테 너무 좋은 책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홍보만 잘 되면, 우리 센터도 잘 되고, 유명해질지도 몰라요.
너무 솔직했나요? 어처구니없으시죠? 정말 그렇게 될 거니까 두고 보세요.”
역시 강사랑은 아너 그룹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맞았다. 그때 만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부나 신분을 물려받은 사람, 능력이나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 기가 막힌 운을 타고난 사람, 그들 사이에 기회주의자나 자신을 잘 포장한 사기꾼들이 도처에 끼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성공하는 법이 없었고, 자기 돈으로 무언가를 하는 법도 없었다. 남의 생각과 남의 돈을 어떻게 자기 것처럼 잘 굴리느냐가 성공의 비결처럼 보였다. 강사랑은 남의 책으로 유명해지려는 아직 성공하지 못한 그런 부류일 뿐이었다.
“성공하려고 책을 쓰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어차피 사는 인생 그저 그렇게 살기보다는 성공하면 좋고, 성공 안 한다고 안 바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아닌척해도 책을 쓰는 이유가 어떻게든 자기를 알리려고 쓰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아니라면 힘들게 퇴근하고 와서 해질 때까지 재미없는 한미숙 작가님 강의를 들을 이유가 없잖아요. ㅎㅎㅎ
오해는 마세요. 한미숙 작가님 재미는 없지만 좋은 분 같아요. 재미없기는 하잖아요. ㅎㅎ”
반칙을 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교묘한 반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 그러면서도 반칙하는 것을 숨기고 누구보다 떳떳한 것처럼 행동하는데, 적어도 강사랑은 반칙은 숨겨도 속물인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혹시 책 왜 쓰시는 거예요? 완성하신 담에 안 팔려도 서점에 등록은 하실 거죠? 기념으로 보관만 하신다던가 그러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아~ 저도 강의 들으면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아직 팔린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습니다.”
내가 쓴 책을 누가 돈을 내고 산다는 생각은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럼 책 쓰시는 이유가 뭐예요?”
가벼운 헛웃음이 나왔다. 돈이 없어 눈물을 흘리다가 우연히 책 쓰기를 결제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 광고를 봤습니다. 책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날 갑자기 뭔가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왜 쓰고 싶었는지 잘은 모르겠고, 아직도 왜 쓰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시작해 보니까 재밌습니다. 저랑 유머 코드도 맞고 마음도 맞는 단짝을 만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소설이라 현실에서 못해본 일을 주인공한테 대신시켜보면서 재밌게 쓰고 있습니다.”
글 속에서 나는 주인공에 투사되어 친구들과 여행도 떠나고 비밀도 나누고 이미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이루고 있었다.
“어떤 내용이길래 글 쓰는 것이 그렇게 재밌어요?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훈련법이나 반려견 문화를 쓰니까 쓰면서도 질릴 때가 있거든요.”
“주인공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친구들이랑 카지노에 가서 돈을 따보려고 시도하는 중입니다. 아직 거기까지 밖에 못 썼습니다. 말로 하니까 딱 한 문장밖에 안 되는군요.”
“어머, 주인공이 생각을 읽어요? 제 이상형인데요. 재밌겠어요. 그럼 주인공 너무 힘들게 하지 말아 주세요. 다 쓰시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아~ 그러시구나, 재밌어서 쓰시는구나! 저만 너무 속물 같았네요. 그래도 진짜 이 책 내고 나면 잘될 것 같아요. ㅎㅎㅎ 다른 분들도 왜 책을 쓰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강사랑은 길 잃은 솔직한 속물이라서 밉지는 않았다. 책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해가 져가고 있었다.
“저희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한참을 좁은 계단에 앉아있어 불편했는지, 강사랑이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다 마신 커피잔을 들고 먼저 일어나서, 나도 모르게 강사랑을 일으켜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