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다
등대로 이어지는 좁은 길은은 좀 전만 해도 바위가 드러나 있었으나, 그사이 물이 들어와서 바다 위로 난 다리처럼 변해 있었다. 해지는 바다와 빨간 등대를 뒤로하고 이제 막 깔리기 시작하는 어둠 사이로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다리의 바닥과 바닷물 높이가 한 뼘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물 위를 걷는 것 처럼 보였다.
“여기 물 위를 걷는 것 같지 않아요? 지금 너무 예뻐요. 그러니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해지는 바다 풍경에 기분이 들뜬 듯한 강사랑이 물었다.
“지금은 아너 그룹에서 일 안 하시나요? 그냥 궁금해서요. 왜 이런 시골에 계실까 싶어서요.”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만뒀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네. 괜찮습니다.”
사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정말 이상형이신 건가요? 그냥 궁금하기도 하고, 소설을 쓸 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서요.”
다른 사람의 진짜 마음이 듣고 싶다면 먼저 솔직하게 묻는 것이 좋다. 솔직한 질문을 한다고 솔직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지만, 말은 진심을 숨겨도 마음은 숨기는 법을 모른다. 솔직하게 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것이 다른 이의 진심을 쉽게 알아내는 노하우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들을 필요도 없이 솔직하게 말해줬다.
“음 책을 쓸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시니까, 자세히 말씀드려야겠네요. 부모님이 어릴 때 이혼을 하셔서 엄마 집 아빠 집을 오가면서 살았어요. 전 외동이라 형제도 없었고요. 엄마, 아빠, 모두 잘 살지 못해서, 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지 어릴 때부터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결혼을 하면서 연락이 끊겼고, 아빠랑 살다가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아버지도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죠.
그러고 나서 어찌어찌 힘들게 살다가 강아지 훈련사들은 숙식이 제공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훈련사를 시작했죠. 강아지 돌보는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대표님이랑 강아지들이 모두 다 잘해줘서 한동안 행복하게 지냈죠. 그때가 갓 20살이 됐을 때고, 대표님이 사십 대 중반이었는데, 너무 잘해주시고,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해서 믿고 따르다가 연인 사이가 됐죠. 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훈련사님 따라서 아너 그룹 촬영장 따라간 거예요. 거기서 거의 4~5년 넘게 일했거든요. 촬영장에서 뵀을 때 엄청 멋있으셨어요. 그래서, 오래 지났는데도 알아볼 수 있었죠. 저희 훈련사님은 그때도 저를 내팽개치고서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느라 제가 밥을 먹는지 못 먹는지도 신경도 안 쓰는데, 제가 뒤치다꺼리 다 했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너무 어린 저를 여러모로 이용한 거였죠. 한참을 몰랐죠. 대표님이 아주 악한분은 아니라서 잘해주신 부분도 있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다 맞춰드렸는데, 결국 제대로 돈도 못 받고 명의까지 빌려주는 바람에 빚까지 떠안고 세상 공부 제대로 했어요.
기댈데 없는 어린 마음에 훈련소 대표님이 저를 구원해 준 구원자라고 생각했죠. 부모님도 형제도, 친구도 살면서 사랑해 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직업도 주고, 애인도 돼주고, 집도 주고요.
지나고 보니까 대표님은 저를 이용했고, 저도 대표님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더라고요. 사람이 그리워서 시키는 대로 했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 힘든 것 다 참아가면서요. 어디라도 기댈 곳이 필요했거든요. 살면서 저를 사랑해 준 건 강아지들 밖에 없어요.
그래서~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온전하게 표현하면서 예쁘게 살고 싶어요. 마음을 듣는 사람이라면 아마 잘 이해해 줄 것 같아요. 항상 양보하고 참지 않아도 이해해주겠죠?
사는 것이 좀 힘들었지만, 사람들 생각은 다 똑같지 않나요? 제가 좀 속물이잖아요. 오픈카 타고 오고 싶다고 했잖아요. 마음속의 치졸한 나쁜 마음, 아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가릴 것 없이 다 투명하게 봐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거죠. 가짜 구원자 말고 마치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다 보고도 사랑해 줄 수 있는 진짜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어요.”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하신 이유가 이해가 됩니다.”
어려운 지난 시간을 덤덤하게 이야기해 줘서 의외였다.
“ㅎㅎㅎ 매우 허황된 생각이죠. 성공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제가 다 꿈이 커요. 언젠가 다 이루겠죠.”
허황된 꿈이라고 말하면서도, 꼭 이루고 말겠다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진실을 내뱉었다. 비싸고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것과는 달리 강사랑도 사정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 보증금도 없어서 소상공인 지원사업으로 면접을 두 번이나 보고, 보증금 350짜리 사무실에서 「한국 반려견 문화 센터」 하는데, 진짜 구원이 필요하다!’
마음으로도, 재정적으로도 기댈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군요. 괜한 질문을 했나 봅니다.”
“아니에요. 이제 한참 지나서 괜찮아요. 어릴 때 정도만 다르지 다들 당하는 거니까요. 돈 못 받는 거 생각보다 흔하고요, 지나고 보니 다 별일 아닌 것 같아요.”
사실 마음을 숨기는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 어쩌면 마음을 듣는 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를 다 아는 것이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몰라도 되는 재정 상황까지 듣는 바람에 괜히 미안해졌고, 별일 아니라고는 했지만, 과거를 들추는 것은 언제나 씁쓸한 맛이 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미 어두워진 길을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간신히 밝히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 한 대도 없는 해안도로는 깊게 어두워져 있었고, 강사랑은 세상과 혼자 맞서온 깊은 외로움에 어두운 길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한편은 항상 울고 있었던 것처럼, 울음은 끊기지도, 격해지지도 않고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나직하게 배경 음악이 되어서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구원을 만나기를 나도 간절히 원하게 될 정도였다.
긴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마침내 집 앞에 도착했다.
“오 역시 여기 사시는구나, 여기 비싸던데. 참 아까 만든 향초 챙겨 왔어요. 잘했죠? 글 쓸 때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너무 귀여울 것 같지 않아요?”
나를 위해 챙겨온 향초를 건넸다.
“기사 쓸 때 연락드릴게요. 들어가세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분명 마음속으로 낮게 흐느껴 울고 있었는데, 우리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강사랑의 마음은 다시 바쁘게 나를 견적 내고 있었다.
‘역시 아너 그룹 다니던 분이라 좋은데 사는구나. 자가인가? 시골 빌라를 사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몇억 하던데…. 근데 차는 왜 판 걸까?’
강사랑의 마음이 울음을 그치고 다시 바쁘게 계산을 시작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속물이라서 삶을 잘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