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이고 굳히는 일
이명수는 기자단 활동을 시작할 때 나눠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기자증을 딸의 목에 걸어주고, 여섯 살 된 딸의 손 잡고 주차장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만나서 이순자 아주머니 트럭을 내가 얻어 타고, 강사랑 차를 이명수와 딸이 타고 가기로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트럭을 타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셋이서 나란히 트럭에서 내려 주차장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명수의 딸 혜인이는 신이 나서, 아빠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다시피 걸어오고 있었다.
천도복숭아 농장 체험관에 가서 만들기 체험을 하면서 시민기자 활동을 하기로 한 날이다. 이명수가 딸을 데려오면서 어른들에게도 나들이가 되었다.
건물 앞면 전체는 통유리로 되어있고, 앞마당에는 커다란 복숭아 캐릭터 모양의 조형물과 사진 촬영용 벤치가 잘 꾸며져 있었다. 기사에 쓸 사진과 혜인이를 위해서 아이를 가운데 세우고 간판이 잘 나오도록 기념사진을 찍었다.
체험관은 마을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세련된 카페 같은 공간이었는데, 한쪽은 카페로, 나머지 한쪽은 만들기 체험을 하는 공간이었다. 만들기 체험을 하는 쪽은 길고 흰 책상이 쭉 놓여 있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아래쪽에 놓여 있었다. 뒤쪽 벽에는 복숭아 향수, 복숭아 모양 인형, 향초, 디저트, 케이크같이 복숭아로 만든 다양한 상품과 복숭아 농장 사진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명수는 딸을 데리고 이곳저곳 구경에 나섰고, 이순자 아주머니와 나는 기사에 필요한 실내 사진과 여러 가지 소품 사진을 찍었고, 강사랑은 어떤 체험을 어떻게 진행하고 기사를 어떻게 게재하는지 체험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예전에는 잘 모르고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별 의미 없는 일을 같이한다는 것을 시간 낭비로 여길 때가 있었다. 내 세상에는 업무 영역에서 만난 사람과 사생활의 영역 안에 만난 사람만 존재했다. 잘 모르는데 아는 사람을 기억할 필요도 에너지도 없었고, 오로지 업무와 사생활 두 세계만 존재하는 세상은 조화롭고 명료했다.
그러나 오늘의 취재 활동은 잘할 필요도, 성과를 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업무의 영역에 있는 사람도 사생활에 있는 사람도 아닌 어쩌다 모인 사람들이었다. 적당히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줄 몰랐다. 쓸모 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사는 동안, 오늘처럼 시간을 낭비하면서 살아야 했다. 기사에 실을 사진을 대충 찍고 강사랑과 이순자 아주머니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혜인이가 아빠와 같이 향초를 만드는 것을 끝끝내 거부했기 때문에, 테이블에 다섯 명분의 향초 만들기 도구가 준비되었다. 강사랑과 이명수, 혜인이가 모델을 하고, 이순자 아주머니와 내가 사진을 찍어서 함께 기사를 올리기로 했다. 체험활동은 종류가 많았는데, 혜인이가 단번에 복숭아 아이스크림 만들기를 골랐고, 강사랑이 복숭아 향초 만들기를 골랐다. 향초를 먼저 만들고, 굳히는 시간 동안 아이스크림을 만들기로 했다. 향초 만들기는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도구가 작은 것이 많고 끓이는 것이 많아서 아이가 혼자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이명수는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뒤쪽에 서서 아이가 향초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면서 자신의 향초도 만드느라 분주했다. 건너편에서는 사진 찍느라 더딘 나와 이순자 아주머니 몫까지 김사랑이 향초를 만들고 있었고, 우리가 요구하는 포즈도 취해주면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다섯 명분의 초가 될 기름과 왁스를 섞어서 이명수가 핫플레이트에 녹이기 시작했다.
“왁스 녹이는 것은 뜨거우니까 혜인이 것까지 해줄게, 혜인이도 아빠가 못하는 거 도와줘”
“응 알았어.”
투명한 유리 비커에 오일과 왁스를 섞어 넣고, 천천히 녹이기 시작하자 고소한 듯한 양초 특유의 밀랍 냄새를 풍기면서 투명하게 한데 섞이고 있었다. 다섯 명분의 향초를 만들 오일 분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한참이나 끓여야 했다.
“아빠 왁스 녹이는 거 너무 재밌겠다. 아직도 더 녹여야 해?”
“응 이제 1분밖에 안 지났잖아. 5분만 녹이면 돼. 기다리면 금방 녹아”
“아직도 더 녹여야 해?”
“좀 더 녹여야 해 기다려 혜인아”
“아빠 안 보이니까 내가 녹았는지 봐줄까?”
“아직 더 기다려야 해, 이따가 봐줘”
오일을 끓이는 것을 못 하게 해서 그런지 혜인이는 양초 녹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다 녹았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아빠 다 녹았는지 봐줄까?”
“아직 이따가 봐줘”
“아빠 안 보이니까 내가 녹았는지 대신 봐줄까?”
“혜인아 아빠 녹았는지 잘 보여, 조금만 기다렸다가 다 녹으면 향초로 만들자”
이순자 아주머니가 혜인이를 달랬다.
“아니에요! 우리 아빠 진짜 안 보여요! 그래서 제가 봐주는 거예요”
“아니야 너희 아빠 아직 잘 보여, 딸이라 아주 정이 많네요. 야무지고”
이순자 아주머니가 이명수와 혜인이에게 동시에 말하는 순간 혜인이가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아빠 눈 진짜 안 보여요. 진짜 쪼끔밖에 안 보여요. 공장에서 다쳐서 제가 맨날 대신 봐준단 말이에요. 그렇지? 아빠?”
순간 모두가 당황했다.
“맞습니다. 일하다가 산재로 시력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근데 아빠 아직 잘 보여 혜인아, 혜인이가 항상 대신 봐줘서 고마워 우리 딸”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우리 딸 덕분에 쉽게 말했네.’
이렇게 생각하면서 혜인이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빨리 향초를 붓고 싶어서 실랑이를 계속했고, 우리만 굳어졌다.
그날 밤, 이명수가 눈이 나쁘다고 미리 말해줬을 때도, 누가 더 불행한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왜 눈이 나빠졌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산재를 당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명수가 어떻게 저렇게 유쾌할 수 있는지 의아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명수의 마음의 소리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절망이나 원망, 분노보다는 애정과 희망, 재미없는 농담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을 모두를 찾아오지만, 모두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전혀 몰랐어요. 그것도 모르고 아줌마는 혜인이가 인내심이 없는 줄 알았지, 미안해”
“아빠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왁스 녹여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아줌마 괜찮아요”
혜인이는 마음의 소리가 따로 없었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다 소리 내서 말할 수 있는 나이, 나쁜 생각이라고는 뜨거운 왁스를 아빠처럼 녹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혜인아 왁스 다 녹았나 봐줘. 향초 틀에 붓자”
이명수가 딸을 위해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녹인 왁스에 색소를 섞어 앙증맞은 복숭아 틀에 채워 넣었다.
향초가 굳을 동안 혜인이가 해보고 싶다던 복숭아 아이스크림 만들기를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의 재료가 될 복숭아를 손질하고 갈아두고, 생크림을 준비하면서도 아빠와 딸은 끊임없이 먹고 떠들기를 반복했다. 이런 혜인이가 귀여웠는지 체험관 직원분이 액체 질소를 들고나와서 과장해서 겁을 주기 시작했다.
“자 이제 액체 질소로 아이스크림을 순식간에 얼릴 거예요. 액체 질소는 –200도라서 진짜 진짜 차가워요. 많이 마시면 눈 깜짝할 사이에죽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장난치지말고 조심해야 해요.
그릇에 액체 질소를 부어줄테니까, 재빨리 아이스크림을 저어줘야 해요. 잘할 수 있어요?”
“잘할 수 있어요! 얼른 해보고 싶어요~”
기대에 가득 차서 혜인이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직원이 연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액체 질소를 들고나오자, 혜인이는 과장된 손짓으로 입을 가리면서, 너무 재밌겠다면서 좋아했다. 겁을 주면서도 액체 질소를 만져보게 해줬다.
“아----------! 하나도 안 아프네.
너무 재밌어요!”
혜인이는 살짝 움찔했다가 높은 톤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하나도 안 아프다고 좋아했다. 각자의 그릇에 질소를 부어주고 연기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릇 안에서 재빨리 주걱을 저어서 마침내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아 차가워, 벌써 얼었어요. 이거 먹어봐도 돼요?”
혜인이가 조급해져서 물었다.
“와 맛있다. 진짜 아이스크림 같아요!!”
“혜인아 이거 진짜 아이스크림 맞아.”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어느새 나도 혜인이를 놀리는데 함께 녹아들었다.
“그런데, 액체 질소는 위험한데, 아이스크림은 먹어도 돼요?”
“우리 혜인이 진짜 똑똑한데? 질소는 기체가 돼서 다 날아가서 아이스크림만 남았어. 그래서 먹어도 돼.”
“기체가 뭐야? 아빠.”
“기체는 공기랑 같은 건데….”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혜인이가 기체를 알 리 없었지만,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 갈 무렵에 부녀의 끝나지 않는 대화는 그렇게 꼬리를 물고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는 만든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치우고, 향초를 예쁘게 포장해서 기념사진을 한 번 더 찍은 뒤에 나왔다. 돌아갈 때도 혜인이가 트럭을 타겠다고 우겨서 돌아갈 때도 김사랑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이번 주 책 쓰기 수업에서 봬요” 그 자리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올 때처럼 차를 나눠 타고 떠났다.
혜인이가 안 왔다면 어른들끼리 하는 체험은 재미없었을 것이다. 혜인이는 우리를 녹여서 아이로 만들고는, 진실을 아무렇지 않게 들춰서 다시 굳혀 어른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