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기능
젤로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젤로를 주고 가신 해녀 아주머니는 제주도 사투리를 많이 쓰셔서 하시는 말씀의 반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나마도 우리는 평소에 만날 일이 없어서 꼬치꼬치 캐물을 시간도 없었다. 젤로는 귀와 코에 털이 다 빠질 정도로 영양상태가 매우 안 좋고 깡말라있었지만 금방 회복했다. 며칠정도 지나자 눈치도 점점 덜 보고 활발해졌다.
젤로는 어딘가에서 잘 키우던 강아지를 잃어버렸거나 버린 것 같았다. 배변훈련도 잘 되어 있었고, 손, 앉아는 물론이고 빵쏘면 죽는시늉을 하는 훈련까지 되어 있었다. 우리 마루는 빵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간식이 웬만큼 마음에 들어야 귀찮아하면서 겨우 죽는시늉을 해줬다. 젤로는 손가락 총을 10번을 쏴도 매번 귀엽게 죽는시늉을 해줬다. 우리는 매일같이 젤로의 새로운 숨은 기능을 찾겠다고, 귀찮게 했다.
너의 과거는
심심할 때마다 어디서 뭐 하다 왔느냐며 과거를 물었다. 몇 살인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젤로는 미스터리 한 퀴즈가 되었다. 산책할 때마다 우리는 젤로의 과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젤로와 우리는 사실 같은 날 제주에 도착했는데, 제주에 반한 젤로가 주인을 따돌리고 제주에 살기로 결정한 모험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다음날은 제주도까지 와서 젤로를 버리고 간 주인을 기다리는 슬픈 사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가다가 주인을 잃어버린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산책 내내 젤로의 과거를 수백 번 만들었다. 액션물의 집 지키는 전투견이었다가, 사랑에 빠진 철 모르는 강아지이기도 했다. 결론은 항상 운명적으로 우리를 만나서 제주도를 정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다.
젤로를 만나기 전에는 유기견을 데려온다는 것, 과거를 모른다 것은 두려움이었다. 많이 아플지도 모르고, 사나운 개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 두려움을 핑계로 새끼 강아지를 사는 죄책감을 상쇄했다. 그런데 사실 알아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많다. 우리는 스스로의 과거를 훤히 다 알지만, 우리는 백점이었던가, 우리 과거를 다 아는 부모님은 다시 우리를 기를 것인가 질문해 보면 답이 나온다. 거기에 아기 강아지가 귀엽다고 데려온다면 몇 가지 질문을 추가하면 더 쉬운 답을 얻을 수 있다. 내 몸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아기강아지를 위해 더 부지런해질 자신이 있는가? (아기강아지의 가장 큰 특징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이것은 백이면 백 다 그렇다.)
젤로를 키우기 전에 우리도 유기견 입양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개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 성견을 데려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경험이 적을수록 성견을 데려오는 것이 나은 것 같다. 휴일에 조카를 대신 봐줘야 한다면, 유치원생조카를 대신 봐주겠는가 아니면 고등학생을 봐주겠는가? 아기강아지는 유치원생 아이처럼 봐줘야 한다. 하루종일 칭얼대고, 제멋대로이면서, 먹을 것도, 화장실도 모두 챙겨줘야 한다. 어린 강아지는 동물병원 갈 일이 한동안 많고, 비용도 많이 든다. 반면에 전혀 훈련이 안된 성견이라도 고등학생 같은 구석이 있다. 이제 좀 차분할 줄도 알고, 밥정도는 알아서 챙겨 먹을 수 있고, 화장실도 어딘지 한두 번 알려주면 된다. 하루종일 따라다지도 않고, 말귀를 알아듣는다.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면 괜찮은 선택이다.
유기견 보호소도 이런 입양자들의 고민을 잘 안다. 그래서 건강상태를 체크해주기도 하고, 요즘은 지자체에서 중성화 비용이나 초기 미용비용, 물품구입 비용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또 보호소는 생각보다 선택지가 다양하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에서부터 고양이 품종견, 성견 온갖 종류의 개들이 다 들어오고, 공고도 인터넷을 통해서 이뤄진다. 시간을 들이면 원하는 외모의 강아지도 충분히 고를 수 있다.
누군가의 구원
누군가의 구원이 된 적이 있는가? 생명의 은인이 되거나, 백마 탄 왕자가 되어준 적이 있나?
살면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강아지를 입양할 계획이 있다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유기견 보호센터를 그냥 방문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사랑은 운명처럼 만나게 돼있다. 살면서 잘한 일 착한 일이라고 자신하는 일이 몇 개 없는데, 젤로를 우리 삶에 받아들인 것은 가장 잘한 일이었고, 백만 번의 웃음과 백만 번의 추억과 영원한 사랑을 예약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젤로를 구해줬다고 착각했지만, 젤로는 사는 내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집을 지키는 용맹한 테리어였다. 덩치가 크던, 작던 다른 개들을 다 물리치고, 손님들에게는 살갑게 애교를 부리면서 접대를 했다.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