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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래토드 Nov 23. 2024

사춘기의 결국

 



텃밭의 작물들을 가꾸다 보면, 식물들이 어느 시점에서 성장 속도를 늦추고 결실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씨앗 하나가 움터서 올라온 줄기와 가지는 시작점보다 백배도 넘는 씨앗을 품은 열매들을 달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기특하다. 자신의 때에 아무리 거친 세월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굽고 혹은 메마르게 자랐다 하더라도 애타게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고 작은 씨앗이라도 내고야 만다.


사람에게도 성장을 늦추고 몸이 비로소 자녀를 낳을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사춘기가 온다. 아직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때가 어쩌면 이리도 빨리 오는가 싶으면서도, 어느새 눈빛과 생각이 또렷해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너무도 탁월하여, '아... 더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지 않을 수 있겠구나.'며 인정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여자는 12세, 남자는 13세에 어른의 대열에 들었음을 인정받는 성인식을 치른다고 한다. 이는 얼추 여아는 초경을, 남아는 몽정을 시작할 사춘기 나이다.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라."라는 창조주의 첫 축복이자 당부를 지킬 수 있는 때, 즉 생육이 가능하게 되는 시기를 어른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이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어쩌면 -충분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른의 역할을 감당하기 전에 거치는 인턴십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차 어른으로 살아갈 수십 년의 삶에 비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지만, 탯줄이 끊어지며 엄마의 몸에서 따로 떨어지게 된 이후로 다시 한번 극명하게 독립된, 자기 인생의 답을 이제 막 스스로 찾아내기 시작하는 시기. 


생육의 과정은 홀로 할 수 없다. 성장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와 하나 되는 삶을 경험함으로 가능하게 된다. 나와 동시에 누군가를 발견해 나가는 이 놀라운 여정 속에서, '나의 완전함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와 하나 되어 살 수 있을까?'라는,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질문의 답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사춘기의 결국은, 

자신만의 완전함에 이른 좋은 어른으로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에서 온다.

배우지 못했다면, 아직 우리의 사춘기는 끝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요즘, 사춘기의 딸에게 어른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고 있다.

주방 한켠과 독서대 한켠, 혼자만의 시간 한나절.


자신에 대하여 맹렬하게 알아가고 있는 아이는, 내게 무언가를 묻고선 대답을 들은 후에 고개를 끄덕이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한 뒤에 맞다고 여긴 다음에야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로는 눈을 좌우로 돌려가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 자리를 떠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나의 대답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의미다. 내게서 나온 자와의 이 다름에 나는 무척이나 설렌다. "너의 생각은 어때?"라고 곧바로 묻고 싶지만, 꾹 참고 아이가 결론을 내리기까지 기다린다. 짧으면 몇 분, 길면 며칠 뒤에야 들을 수 있는 아이의 대답에는 정말 놀라운 점이 많이 있다. "이야, 엄마가 너한테 배웠다. 정말 멋진 생각인데?" 이런 류의 감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사춘기 딸과 흥미진진한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살다 보면, 빼곡하게 기록해 둔 메모장보다 백지장이 오히려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자국에서 때로 놀라운 지혜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그 모든 실패가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러므로 어른은 나이나 경험이 더 많다고 해서 아이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 말할 수 없다. 이제 막 번데기를 가르고 나온 나비처럼 포슬포슬하게 어른으로 펼쳐지고 있는 아이의 결을 바라보며, 자아가 손상되기 전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이 무엇이었는지를, 사람으로서 무엇이 진정한 가치였는지를 사춘기 딸을 통해 다시금 배우게 되는 요즈음이다.




















Photo by Henri Guérin: https://www.pexels.com/photo/close-up-photo-of-grape-fruit-197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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