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D-1 수면제를 모으다

죽고 싶진 않았어

by 그리다 살랑


“걔 지금 뭐 하고 있니?”

“하루 종일 울고 있어요.”

“걔가 정신이 있니 없니? 빨리 결정을 해야 우리가 갈지 말지 정할 거 아냐!!!

빨리 결정해서 연락하라고 해!!”


격앙된 목소리로 고모는 전화를 끊으셨다.

가만, 분명 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이 대화를 내가 왜 기억하고 있는 거지? 내가 전화를 받았던가? 모르겠다. 어서 결정해야만 한다. 퉁퉁부은 눈으로 울고 있다가 이불을 확 걷어치웠다. 아무 잠바나 걸치고 집을 나왔다. 어딜 가냐고 언니가 소리를 질렀다.


집 앞은 시장이었다. 8년을 살았지만 한 번도 사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던 우중충한 가게들을 지나쳤다. 아니 그건 내 시선이었다. 아침마다 활기차게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조금씩 진열을 달리하며 물건도 바꿔가며 운영됐을 터였다. 반복되는 일상의 생기를 알아볼 눈이 내게 있었더라면. 골라골라 과일장수 아저씨는 마이크를 귀에 걸고 방정맞은 큰소리로 랩을 하듯 외쳐댄다. 아오, 오던 사람도 도망가겠어요. 시장을 오갈 때마다 올라오던 욕지거리들이 오늘은 잠잠하다. 모든 소음이 머리와 귀와 가슴에 한데 엉켜 웅웅거린다.

곧장 약국을 향해 들어간다.

“수면제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반대편 골목으로 다른 약국을 향해가고 그다음 약국에 들른다. 네 번째 약국에서 나왔을 때 이 이상은 왠지 두려웠다. 범죄는 아니겠지? 갑자기 약사가 내 손목을 탁 낚아채며 “왜 이렇게 자꾸 사는 거죠?”하고 물을까 봐 무서웠다. 남한테 먹일 건 아니에요. 수면제 열 알씩 네 통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와 말하지만, 난 그 약을 다 먹을 생각은 없었다.

죽을라고? 노노 아직 못 해본 게 너무 많아. 그냥 내일 아침, 시체처럼 깨어나지 않길 바랐을 뿐. 왜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잖아,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 그거 새드엔딩인데. 남자 친구가 나를 따라 죽으려고 남은 수면제를 털어 넣을 것 같진 않았다(일단 수면제는 무조건 남길 생각). 죽은 건 아니라고 티는 내야겠는데. 입술에 핏기라도 있으려면 열 알도 먹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고.


그냥.

내일만 오지 않았으면.



친엄마냐 새엄마냐 이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는 어쩜 이리 명제도 잘 만들었을까.

아주 대대손손 수세기를 우려먹을 수 있는 명대사다. 아빠는 어쩜 그동안 여자는 평생 유희로만 만나시다가, 내가 결혼할 때쯤 되니깐 조선족 새엄마와 혼인신고를 하신 거냐. 배경엔 고모가 있다. 일곱 살 연상의 내 남자 친구의 부모님과 친하셨던 고모는 결혼까지 내다보시곤 아빠의 옆자리가 비어있을 것이 영 마음에 걸리셨던 거 같다(근데 내 생각이다). 교양과 예의, 격식의 끝판왕인 고모에게 우리 가족의 흠집 있는 모양새는 참을 수 없을 터였다. 고모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아빠의 옆자리는 새엄마로 채워놨고 예비 사위가 인사 올 집도 필요하니 조금 낡았지만 버젓한 집도 (고모가) 마련해 주셨다.

웃긴 건 그 당시 나는 엄마랑 살고 있었다. 아주 복잡다단하다.

엄마랑 함께 살면서 결혼은 아빠 가족 위주로 하게 된 배경과 어릴 땐 아빠랑 살다가 현재는 엄마랑 살고 있는 경위까지, 이 극적인 대하 서사 치정 드라마의 시퀀스를 한번 듣고 이해하는 사람은 내 무릎 꿇고 엎드려 백팔배를 올려드리리다. 아 근데 나 교회 다닌다.


결혼식이 코앞인데 엄마는 엄마가 서겠다고 하신다.

고모는 너네 엄마 오면 우리 쪽은 아무도 안 갈 거라고 하신다.

아놔 아무도 서지마 결혼식 안 해 다 때려치워.

-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면 지금껏 10년 넘게 정신과 약을 먹는 일은 없었을 테지.

“그렇게 니 맘대로 할 거면 우리랑 상의는 왜 했니!!!”

고모는 정신과 약을 안 먹어도 돼서 좋겠다.


아니 그런데 내가 내 맘대로 한 게 뭐란 말인가.

엄마가 결혼식에 와야 할 것 같다고 쭈뼛쭈뼛 말했을 때, 고모는 식탁 유리를 쾅 내리치셨다. 집안의 실세인 고모에게 저 말을 목구멍 밖으로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끙끙대며 무서워했던가. 깨갱 한번 했다가 기가 질릴 대로 질린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이 퉁퉁 부어 터질 때까지 우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결론을 내야 하는데, 고모는 무섭고 엄마는 불쌍한데 난 어떡해야 돼.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다섯 알을 털어 넣었다.

스물넷, 몇 시간 후면 나의 결혼식이다.










*사진출처_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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