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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스락 Sep 21. 2024

슬픔과 원망의 침묵 (가족의 감정매몰 털어내기 1)

감정에 솔직해지는 연습 

우리는 왜 그토록 숨죽여 울었을까? 가족이 있는데 없다. 부모가 있는데 없었다. 보호받지 못한 유년 시절 가슴에 끌어안고 살고 있는 고독 속 외침이 마른 장작처럼 깊은 숙면에 취해 있었다.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슬픔의 잔상들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 큰언니와 통화를 하면 매번 언니를 위로하며 전화를 끊게 된다.


공허한 하루에 위로받고 싶어 문득 전화를 건다. 표면적 감정보다 내면적 감정에 서툰 나는 절제된 감정으로 

응수한다.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가다 보면 모래알만 이야기가 언니 아픈 과거를 소환한다. 결국 상처에 다시 상처 하나를 깨우고 만다. "언니 괜찮아, 이제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언니만 챙겨" 결국 정해진 결과에 정해진 대사 한마디로 통화를 종료한다. 허탈하다 아픔은 왜 자꾸 아픔을 들추는 걸까? 시간이 흘러도 아픈 기억은 영영 사라지지 않는 걸까? 혹시 그 상처를 잊고 싶어 발버둥 치는 걸까?


마치 예전에도 지금도 없었던 감정처럼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앗, 살짝 옷자락을 스치기라도 하면 폭포수가 되어 쏟아져 나오는 상흔의 흔적들. 아마도 언니도 나처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지 걱정과 연민이 느껴진다. 언니의 어린 시절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주체성을 지녔을 때 언니는 서울살이로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줄 알았다. 아무도 나에게 언니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 알지 못했다. 그녀의 유년 시절, 고작 열세 살 나이에 언니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명절을 하루 앞두고 엄마가 쓰러지셨다. 매번 명절이 고비인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댁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일단 엄마를 뵈러 갔다. 밤새 코피를 흘려 잠을 못 잤다는 엄마 얼굴은 창백했다. 뭐라도 드셔야 한다는 생각에 죽을 끓여 드렸다. 한참 후 약을 드시고서야 기력이 조금 돌아오는 듯했다.


엄마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니 보드랍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얼굴은 반듯한 고속도로는 온데간데없고 구부러진 시골 비포장도로의 움푹 파인 웅동이처럼 주름이 만들어낸 깊은 웅동이뿐이었다.


"엄마 로션도 안 바르셔, 얼굴에 생기가 없잖아요"

"주름이 이라고 많은데, 바르면 뭣한데" "아니야 그래도 발라야지" 엄마 얼굴을 마사지하며 턱선에서 볼까지 보드랍게 밀어 올렸다. "이렇게 해줘야 주름도 안 생기지" "아침에 세수할 때 이렇게 해줘 응"


무슨 이유로 잠도 못 자고 코피까지 흘러가며 속을 태우고 있는지 엄마 얼굴을 만지며 살며시 물었다. 명절이 다가와 악몽을 꾼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한참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엄마 큰언니 제주도 갔어, 알고 계시지!" "그래서 이번 명절에 언니 못 와요"

잠시 흠칫 놀라던 엄마는 주름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듯 붉은 화를 참아 내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혹시 언니랑 무슨 일 있었어요?" 엄마는 조용하지만 서러움는이 묻어있는 목소리로 언니와의 일들을 이야기하셨다.


(내가 지를 뭣한다고 숭보고 다니것나, 요새 교회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받길래 꺽정 돼서 집 앞에 과일도 사놓고 왔는디, 그라고 며칠 뒤 다리 다쳤다는 야그 듣고 꺽정스럽냐. 몸은 괴안은지 전화했더니, 여기저기 전화해서 지를 나쁜 사람 맨든다고 연락도 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믄서 전화를 끊어부러야, 내가 그라고 잘못했다냐, 가스나가 이상해졌으야.)


(보는 사람마다 왜 교회 안 나오냐고 물어본께, 나도 모르겠오 전화잔 해보시오, 내가 그 말은 했는디 딴말은 한 게 없당게, 혼자 꼬라갓고 오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는디 그게 뭔소리다냐, 오메 가슴이여!)


엄마는 한참 이야기하더니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답답함, 서운함, 서글픔, 원망을 호소하셨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엄마 스트레스는 언니의 차가운 말투와 행동 그리고 냉정함이었다.

엄마는 언니를 엄마처럼 의지하고 사셨는데 요즘 언니는 정을 떼는 사람처럼 부쩍 쌀쌀맞았다.


"엄마, 언니가 요즘 육춘기를 겪고 있나 봐,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까?"

"내가 밥을 주라고 하냐 돈을 주라고 하냐, 전화도 안 받고 찾아오지도 않응 게, 꺽정이 되제 안된다냐"

"시상 지만 힘들다냐 다 그라고 살아야, 혼자만 그라고 힘들다냐"




언제부턴가 언니는 과거에 갇혀 현재와 미래를 아픔에 가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 지금 언니에게는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고 아마도 그 대상이 가족인 것 같다. 언니는 우리에게 엄마 그 이상인 존재였다. 큰 딸로 태어나 어깨에 큰 짊 보따리를 칭칭 매달고 살다 지친 것 같다. 억울함과 원망이 언니 감정을 뒤흔들고 있기에 지금은 옆에서 묵묵히 언니 얘기를 들어주고 안아주고 보듬어 주고 공감해 주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 언니한테 속상한 거 알겠는데, 언니 장녀로, 장남으로 가장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잖아, 그러니 다시 제자리로 올 때까지 기다리자, 아니 안 돌아올지도 몰라, 그때는 그냥 우리가 먼저 손잡아주자"


"형부한테 전화해서 제주도 갔는가, 잘 다녀오게 우리 딸 이삔 사진도 많이 찍어주게나" 엄마가 이렇게 먼저 얘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애처로운 눈빛과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흐' 한숨을 쉬신다.




어쩌면 언니는 지금 관심과 애정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정이 없다는 언니 마음을 엄마는 알까?

같이 산 시간보다 떨어져 산 시간이 많은 우리 가족은 함께하는 익숙함이 낯설다. 엄마도 아들딸 손을 먼저 잡아 본 적이 없다. 표현이 서툰 만큼 슬픔이 그 자리를 다 메워버렸다. 서로 움켜쥐고 있는 아픔을 아버지는 그냥 두고 가셨다. 우리 가족에게 무거운 침묵만 남겨주고 가셨다. 


명절 때면 찾아오는 아픔의 사슬을 이제는 끊어 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슴 및 바닥에 깔린 슬픔을 덜어내며 살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여전히 우리는 슬픔을 덜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언니도 그 방법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니의 유년 시절은 고달팠고 힘들었고, 상처투성이였다. 어린 나이에 오롯이 혼자서 남의 집 빨래, 청소를 하며 감당해야 했던 긴 시간을 누구도 따스하게 안아주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그건 언니 몫이라고 나도 너무 아픈 현실을 살아왔다고 외면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직면하려 하지 않았던 언니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기로 했다.


"언니 제주도 잘 다녀오고 내가 주는 용돈이야, 형부랑 근사한 식사 한 끼 하고, 집에 과일 상자 두고 가" 

 (아무도 없는 언니 집 앞에 과일상자를 놓고, 제주도 여행 잘 다녀 오라고 용돈을 보내줬다.)


언니도 나도 그때는 몰랐던 감정을 이제 느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더디게 배워가는 감정, 왜 몰랐을까? 슬픔은 나쁜 감정이 아니라는 걸 마음 안에 슬픔을 가두고 살다 보니 서러움만 쌓였다는 걸. 


(우리 가족이 지금 분출하고 있는 슬픔은 각자의 몫이 아니었음을 꼬이고 엉켜버린 감정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엄마도 언니도 나에게는 소중하니까)



한 줄 요약 : 우리는 슬픔이 차오르면 울어도 된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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